타지에서의 나 홀로 육아는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경단녀가 되었고 지독한 산후우울증과 향수병이 생겼다

by 애플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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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연애를 할 때 잠깐씩 방문했었던 네덜란드는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다.

마치 걱정거리라고는 하나 없는 꽃과 나무들이 풍성하고 귀여운 집들이 많은 아름다운 동화 속의 장면들 같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마주치는 아름다운 경치들에 흠뻑 취해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가 핸드폰을 길바닥에 떨어뜨려 액정이 깨진 적도 꽤 많다.


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이 나라로 이주해 살면서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 네덜란드어 어학시험 준비, 한국과 원격으로 해야만 했던 프로젝트,

그 후 임신, 출산, 육아를 차례차례 통과(?)하면서

그 아름답던 외국 영화는 눈물 없이는 못 보는 인생극장으로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도 출산 전까지는 자상한 L과의 신혼생활이 행복했고

네덜란드 학교에서 전공 관련 강사 일도 뿌듯했었고

임신기간도 입덧만 빼면 즐거웠다.


예전에 하던 일과 네덜란드어 시험 때문에 번아웃이 있어 그림은 못 그렸지만

이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도 많았고 함께 자주 놀러 다녔기 때문에

나는 출산 전까지는 향수병이 전혀 없을 정도로 잘 지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은 나의 베이비샤워 파티도 정성스럽게 챙겨주었다.


하지만 출산 후 나는 일을 그만두었고

해외에서 혼자 육아를 하며 지독한 향수병과 산후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


친정가족과 오래된 친구들이 없는

낯선 나라에서 나 홀로 육아를 한다는 것은

예상보다도 훨씬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이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날씨도 춥고 비가 오는 날이 많은 나라라서

한 겨울에 태어난 신생아와 하루 종일 집에만 (갇혀) 있다 보니

산후 우울증과 향수병은 갈수록 심해졌다.




"난 내 딸, 애플이 가 나중에 국제결혼한다고 하면 반대할 거야.
나중에 애를 낳았는데 내가 멀리 살아서 못 도와주면 어떻게 해.
애플이는 내가 임신했을 때부터 출산 후까지 가까이에서 전부 도와줄 거야.
음식도 전부 영양가 많고 손 많이 가는 것들로만 정성스럽게 만들어 갖다 줄 거야"


어느 날 내가 혼자 육아하다가 너무 힘들어 펑펑 울면서 밤중에 남편에게 했던 말이었다.

남편은 미안한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했다.


누군가가 돈은 벌어야 했기에

내 출산 후 휴가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예전처럼 남편 L은 주 5일 출근을 했고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면 나는 오롯이 아이와 집에 하루 종일 둘이 있어야 했다.

남편이 퇴근을 하면 육아나 살림 등을 함께 했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기와 함께 혼자 있어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초보 엄마라서 모든 것이 서툴렀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먼저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또 주변 가깝다고 생각한 지인 중 한 사람이

아기는 누구나 낳는 거고 힘든 건 당연한 건데 그깟 일(?)로 오버하며 엄살 부리지 말라고 말해서

더더욱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힘들었다.

내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면 뒤돌아서서 저런 일로 자신들을 불렀다고 나를 욕할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새로 사귄 재미있던 친구들은 아직 아기를 안 낳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 홀로 육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다 보니

어느샌가 그 친구들하고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겼다.


네덜란드 국가에서 보내는 국가 간호사분은 정말 친절하고

전문가답게 유능하셔서 신생아 기저귀 갈기, 목욕시키기 등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만 주 5일이 일정의 전부였다.


다행히도 한국에서 친정어머니와 여동생이 왔다 갔지만 둘 다 일을 하는 터라 2주밖에 머물 수 없었다.


나는 아무 진통제 없이 생으로 4.3킬로 우량아 애플이를 낳았는데

낳고 나서 오랫동안 잘 걷지 못했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줬으면 했지만 남편의 육아 휴가는 5일밖에 되지 않았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나는 벌벌 떨리는 손과 다리로 조심스럽게 1,2층을 오고 가며 우는 아기를 안고

어떻게든 분유를 타서 먹이고 기저귀를 갈았다.

내 밥은 신랑이 그 전날 만들어 놓고 간 음식이나 아니면 미역국에 밥, 그것이 질리면 라면 혹은 우유에 시리얼을 타 먹었다.

저녁에 신랑이 퇴근할 때까지 목을 빼고 기다리면서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조리원과 산후조리는...

네덜란드에는 조리원이라는 시스템이 없기에 별다른 산후조리를 받지 못했다.

(잠깐 틈을 내서 마사지라도 받으러 갈 것이라고 지금 와서는 후회하고 있다.)


엄마표 집밥이 먹고 싶었어도

채식 주의자에다가 한식은 만들어본 적 몇 번 없는 L이

내가 먹고 싶은 고기, 해산물이 들어간 다양한 한식들을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시댁은 멀리 살았고 또 내 임신 막달에

시아버지께서 많이 아프셔서 수술을 몇 차례 받으셔야 했다.

그래서 두 분이 나를 도와주러 오시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사이가 좋던 L과 나는 수면 부족과 피곤, 아기의 울음소리로 단절된 대화들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이유들과 오해들로 종종 다투었다.


한 번은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크게 말싸움을 하였는데

마침내 품에 안겨서 자고 있던 아기가 갑자기 깨 대성통곡하고 울어서

그 이후로는 서로 속삭이면서 다투거나 입을 꼭 다물고 말을 안 하는 방법으로 다투었다.


그렇게 다툰 날 밤에는 한국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 친정집에 훌쩍 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출산 후 내 몸은 성치 않았고

아기 기저귀, 분유, 소독한 우유통, 공갈 젖꼭지, 갈아입을 여벌 옷들 등등..

챙겨가야 할 아기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으로 가져가야 할 물건들을 세다가 포기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포기를 한 날은 울다가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사랑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왔는데

이렇게 싸우고 저 사람이 꼴 보기 싫어질 정도면

나는 대체 여기 왜 온 거지...

내가 왜 이 먼 타지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지...

나를 원망하고 남편을 원망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온갖 우울한 생각들이 꼬리를 꼬리를 물어 분노로 돌변해 나를 힘들게 했다.


나 자신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산산조각이 났는데

어떻게 원상 복구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고

예전의 빛나던 나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나는 혼자라고 수도 없이 생각했고 외로웠다.

물론 예쁜 아기의 얼굴을 볼 때면 행복했지만

타지에서 나 혼자만의 육아가 힘들 때면 그만큼 외롭고 서럽고 슬펐다.

몸이 아파도 감기가 걸려도 그다음 날이면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볼 사람은 나였기에

나는 아파서도 안되었다.


내가 이 나라에서 기댈 곳은 아무 곳도 없다고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벌판에

내 품속의 아기를 코트로 겨우 감싸면서

비틀거리며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출산한 친구가

한국 시어머니가 고생했다고 곰탕을 끓여 보약과 함께 가져오셨다던가

친정가족들이 아기를 돌봐주는 덕분에 쉬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 마음 한구석에 쌩쌩 부는 찬바람이 느껴졌다.


육아에 신경 쓰느라 항상 내 몰 꼴과 집은 엉망이었고

이런 상황에 서로 안 지 오래되지 않은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주 가끔 친구들이 왔다 해도 나

는 신생아에 정신이 팔려 헛소리만 늘어놓기 일쑤였다...


나 홀로 육아가 정신없는 만큼 한국과 네덜란드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쉽게 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졌다.

매일 바쁘게 울렸던 핸드폰이 점차 조용해졌다.


그렇게

외롭고 힘든 만큼 친정가족들과 오래된 친구들이 몹시 보고 싶었고

그래서

내 향수병은 점점 커졌고 또 그만큼

산후우울증은 나에게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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