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커리어의 터닝포인트가 된 기회와 인연
2020년, 주식창의 그래프가 팬데믹의 시작을 알리던 요란한 아침이었다.
나는 이 날 올해 교육 예산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 대안을 세우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았다. 예산을 절감하는 일은 의외로 매우 쉬웠다. 내가 1년 동안 세워놓은 모든 교육항목을 엑셀표에서 삭제하면 될 일이었다.
수직하강한 주식창의 그래프만큼이나 회사에서의 내 가치도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교육담당자로 다양한 시도를 하며 공고히 해오던 내 역할이 예산 절감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HRD 커리어를 쌓은 지 1년이 갓 넘은 시점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교육업무가 사라진 나의 투두리스트에는 ‘재택현황 보고‘와 같은 온갖 ’ 보고‘ 업무가 채워졌다.
점심을 유독 많이 먹어 잠이 쏟아지는 어느 날의 오후,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나른함을 버티고 있었다.
“‘지주사’에서 ‘뭐’를 한다던데 다녀와봐요."
회장님이 새로 부임하시고, 지주사 사무실이 새롭게 리뉴얼되었다는 소식을 어디선가 주워 들었다. 오랜만에 재밌는 볼거리가 생긴 것이다.
새롭게 단장한 지주사 사무공간은 마치 ‘유치원’같이 알록달록했다. 질서 없이 놓인 빨강, 노랑, 주황색깔의자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의 의자를 골라 조심스레 앉았다.
이어서 남자같이 짧은 머리, 위아래 까만 색깔의 옷, 호탕한 웃음소리를 가진 매서운 눈매의 여자분이 등장했다. 나처럼 영문도 모른 채 앉아있는 무표정한 인사담당자들을 향해 그녀는 쉴 새 없이 미소를 던졌다. 회사생활 9년 차에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었다.
발표하는 목소리는 앙칼지고 힘이 있었으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다. 그녀가 띄운 모니터 화면에는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그림이 있었다.
‘52g’,‘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오픈 이노베이션’,‘카탈리스트’,‘퍼실리테이터‘,’ 해커톤‘
생소한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마구 뿜어져 나왔다. 메모를 하다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에 어느 순간 기록을 포기했다. 나에게 중요한 건 단어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지주사에서 카탈리스트라는 이름의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각 계열사의 인원을 보내라는 말 같았다. 하지만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답답했다.
"지주사에서 우리한테 하라는 게 뭔데?"라는 상사의 예상질문에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는 답변을 가져가는 게 급선무였다. 그녀의 발표를 듣고,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했다.
“카탈리스트 과정의 대상자는 누구죠? 몇 명을 선발해야 하죠?"
"선발 기준은 없고, 원하는 사람이 들으면 돼요."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다. 갸우뚱하는 상사의 얼굴이 안 봐도 뻔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녀에게 명확한 답을 얻어내지 못한 대가는 예상보다 컸다. 내가 그 카탈리스트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파악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시시때때로 기회는 우연을 가장하여 ‘운이 나쁜 줄 알았던 자’에게 오기도 한다. 어쩌다 들어가게 된 카탈리스트 과정은 팬데믹으로 예산이 삭감된 운수 나쁜 교육담당자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그때 만난 인연 덕분에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다.
중요한 기회는 위기를 가장하여 다가오고, 소중한 인연은 우연을 틈타 찾아온다.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모든 상황을 감사하며 받아들일 때, 위기는 기회가 되고 우연은 인연이 된다.
검정 옷을 입은 호탕한 웃음소리의 그녀는 2024년 현재, 나의 직속상사이자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나에게 ”자랑스럽다! “ ”잘하고 있다! “ 격려해주고 있다.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녀를 만난다면, 꼭 알려주고 싶은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다.
우리 52g는 2024년에 무려 80명이 된 엄청 큰 조직으로 성장했어요!
대박이죠?
그녀가 올해 상무로 승진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온전한 서프라이즈를 위해 아껴둘 참이다.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