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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빈 Jul 11. 2024

외딴섬의 등대지기가 되어

#5 시기와 미련

외딴섬의 등대지기가 되어


며칠 전 잠을 자려고 누워 이런 생각을 했다. 누가 나를 예스24 주문만 가능한 빈 방에 한 달만 가둬줬으면 좋겠다고. 인풋 없이 아웃풋만 연속되니 가진 것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서였다. 그러다 꼬리를 물며 연이어 든 생각에 재빨리 눈을 감고 숙면에 들기를 기도했다. 가만, 그럼 아이는 누가 돌보지? 아이를 데려가야 하나? 그럼 아이 밥은? 기저귀는? 옷은? 놀잇감은? 예스24가 아니라 쿠팡이 가능한 빈 방으로 가야 하는 거였구나.


오늘 아침에는 매서운 기세로 휘몰아친 SNS 탭 파도가 또다시 나를 집어삼켰다. 하나 둘 유럽으로 떠나는 친구들과 제 시간을 열심히 굴려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들의 게시물을 보며 마음이 또 조바심을 냈다. 몇 년 정도는 아이를 위해 쓸 수 있잖아, 임신을 한 뒤로 쭉 나에게 주문처럼 외는 말이다. 엄마로서 역할을 단속하기 위해 멀찌감치 미뤄뒀던 자아가 코웃음을 치며 육아 중에도 할 수 있는 자아실현 항목을 리스트업 하는 사이 조바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눈덩이에 갇혀 실패하는 흔적이 늘어갈수록 아이를 낳기 전의 나와 아이를 낳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모습을 그리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외딴섬의 등대지기가 되어 아이의 앞길을 밝히는 현재를 살아야 했다. 오늘따라 아이는 밥을 먹기 싫다 보채고 재우지 말고 더 놀아달라 떼를 썼다. 아이가 몇 시간 만에 간신히 낮잠이 든 뒤 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었더니 아이 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에 후다닥 밥그릇을 개수대에 넣고 물 한 잔을 마셨다. "에-" 종소리는 정확한 시간에 울렸다. 이제 막 오후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아이와의 호흡이 엇박을 타더니 아이가 끼니도 잠도 충분하지 못한 채 오후를 맞이했고, 급기야 아이는 안아서도 달래 지지 않는 강성 울음의 단계로 넘어갔다. 10kg의 아이를 안고 온 집안을 걸어 다니자 아이는 울음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풀었는지 진정과 동시에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밤이면 나의 등대 메이트가 올 테지만, 낮 동안 홀로 서 있는 등대는 시리고 외로웠다. 게다가 공감해 줄 친구들마저도 저마다의 전투 육아로 방전 상태라니. 아이를 키우는 건 일상의 범주라 생각했는데 실은 돌아갈 기약 없는 외로운 섬 여정이었구나, 싶었다. 아니, 이 정도면 모험인가?





초저녁이 다 돼서야 낮잠을 달게 자고 일어난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온 집안을 기어 다니며 웃음을 흘렸다. 베란다 창을 잡고 일어나서는 손바닥을 탕탕 치며 "아-!", "어-?" 옹알이를 하며 한껏 오른 흥을 표출했다. 창밖에 남겨둔 용무가 끝났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와 일어서고 앉고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잡고 있던 두 손을 놓고 두 발에 바짝 힘을 줬다. 내가 놀라 "오오오오오-"를 외치는 사이 아이의 입꼬리는 점점 더 위로 솟았다. 이내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은 아이는 내가 박수를 치자 자랑스럽다는 듯 내 눈을 쳐다보며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는 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방을 향해 기어갔다.


내가 나의 과거를 시기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현재라 믿으며 질투하는 사이, 아이는 과거를 딛고 현재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과거의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오늘의 아이를 만든 건 분명했지만 아이는 아무렴, 하는 표정으로 지금을 기뻐하고 슬퍼하고 때때로 흥미로워했다. 순간 그 미련 없음이 등대가 밝히는 밤바다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내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하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외딴곳에 서서 미련 맞은 생각을 하는 사이 아이와의 현재는 등대 불빛이 닿지 않아 갈 길을 잃은 배 신세가 되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곳을 밝히자. 외로운 등대지기에게도 등대의 힘으로 나아가는 배 동지들이 있고, 그들이 같은 길을 바라봐주지 않던가. 지금 이 외로운 섬엔 아이의 성장을 위해 함께 나아가는 남편과 가족이 있고, 언젠가 내게도 아이의 길에서 빠져나와 나의 길을 다시 밝힐 날이 올 테니. 그때는 또 아이가 나의 길을 같이 바라봐주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해 보면서.


여기까지 생각에 미친 내가 다른 빠방을 들고 아이에게 다가가자 아이는 다시 미련 없이 공 놀이를 하러 떠났다. 그래, 이 미련 없음을 배우자. 그리고 열심을 다해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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