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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빈 May 16. 2024

아이처럼 무해한 사람이고 싶어서

#3 웃음과 전이



잠을 자려고 뒤척이던 아이가 넓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내 옆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바람결에 나부껴 서로를 보듬는 잎사귀처럼, 아이가 좌우로 뒤척일 때마다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이 내 팔과 다리에 가벼이 스친다. 아이도 나도 살이 나부끼며 온기를 나눌 때 찾아드는 안정을 좋아한다. 손바닥을 동글게 말아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 내 손에 이는 바람을 타고 아이의 눈이 기다렸다는 듯 스르르 문을 닫는다. 귀에 들리지 않는, 포근한 바스락 소리에 그제야 둘다 진짜 잘 채비를 한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아이는 종종 고개를 들어 내 상태를 살피곤 하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헤헤-" 소리를 내 웃는다. 아직 더 놀고 싶어 엄마가 진짜 잠이 들었는지 확인하는 신호다. 자는 척을 하려고 감은 눈을 파르르 떨던 나는 대개 아이의 귀여움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핫-" 소리를 낸다. 그럼 아이는 더 크게 "헤헤헤-" 웃는다. 푸핫과 헤헤헤의 향연이 계속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아예 아이와 반대로 누워 본격적으로 자는 시늉을 한다. 그럼 아이는 머리 맡에 놓인 책도 읽고 인형과 사투를 벌이고 엄마를 등반하다가 다시 잠이 찾아드는 순간 모로 누워 손가락을 빨며 잠의 세계로 진입한다.


아이에게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런 날에 마주보고 누워 있던 내가 먼저 까무룩 잠이 들면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아 나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 본다. 어느 날은 이게 사람의 자는 모습이구나 싶은지 가장 높게 솟아 있는 코부터 시작해 눈과 입을 차례로 어루만진다(실은 찌르고 할퀸다). 아직 힘 조절이 어려운 탓에 망그러진 슬라임이 된 내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반응하면 아이는 그걸 또 알아채고 "헤헤헤-" 소리를 낸다. 우리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잎사귀가 되어 또 한 번 두런두런 다정한 웃음을 주고 받는다. 그렇게 아이가 웃다 지쳐 잠이 들면 나도 행복에 겨워 잠이 든다.


감정은 이토록 쉬이 전이된다. 살을 나부끼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감정은 바람처럼 가벼이 마음을 옮겨 다닌다. 잎사귀들처럼 두런두런 마음을 나누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매일이 웃음바다면 좋겠지만, 몸이나 마음이 지쳐 삐걱거리는 날이면 아이를 향해 웃어주지 못하는 날도 더러 있다. 혹은 남편과 사소한 말다툼으로 서로를 향해, 아이를 향해 웃어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럼 아이는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표정을 먼저 살핀다. 최근에는 일명 '밥태기'에 지친 내가 도통 웃어주지 않자 한참 얼굴을 살피던 아이가 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골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뒤늦게 내가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어 보여도 아이는 갸우뚱했다. 이번에는 헤헤헤 소리를 내 눈까지 활짝 웃자 아이는 그제야 같이 헤헤헤 웃었다. 아이가 벌써 부모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고 그에 따라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됐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부정을 부정하기로 했다. 사실 사회생활 연차가 쌓이고 나이가 꽤 들어서도 부정을 내 밖으로 털어내는 데 부단히 애를 썼다. 그때는 부정의 감정을 쌓아두는 일이 버거워 누군가를 붙잡고 나의 부정을 바지런히 옮겨 심으며 살았다. 내 마음 후련하자고 누군가에게 유해한 사람이 되는 줄도 모르고. 어떤 날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부정의 대화로 격앙된 불순한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아 숨이 가빴다. 그럴 때면 변하지 않는 현실이 원망스러워 우울이 마음을 기웃거렸다. 부정을 털어내려다 더 짙어진 부정의 마음을 다스리느라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나와 그런 대화를 나눈 날에는 비슷한 감정에 힘이 들더라는 친구의 말에 감정의 전이가 내 안에서는 물론 상호간에도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나부끼는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이에게도 같은 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올 거다. 누군가와 부정의 마음을 주고 받음으로써 일어나는 연쇄작용이 병충해처럼 잎사귀를 어떻게 갉아내는지, 지난하고 지치고 허망한 마음을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런 순간이 오면 아이가 바람에 흩어져 바닥을 나뒹굴다 결국에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사라지고 마는 낙엽처럼 그 모든 게 언젠가 떠나갈 마음이라 가벼이 흘려보내길 바라게 됐다. 그래서 나는 부정을 부정하며, 나부터 부정을 구태여 입에 담지 않기로 했다. 나로부터 시작된 부정이 남을 타고 다시 나를 활활 태우기 전에. 혹은 남으로부터 전이된 부정의 감정이 나를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기 전에. 그 끝에 나도 모르는 새에 아이에게 부정을 전이시키기 전에. 


그렇다고 흩어진 낙엽이 날개를 달고 다시 나무로 기어 올라가 긍정의 이파리가 되진 않겠지만, 떨어져 버린 낙엽은 누군가 거두어 가고 결국엔 무해한 것들만 남게 되지 않을까 믿어보기로 했다. 불행보다 웃음의 전이 속도가 더 빠르다는 믿음으로. 나 자신에게도 그 누군가에게도, 무엇보다 아이에게도 아이처럼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결국엔 무해한 웃음만을 전이시키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오늘도 나는 아이가 잠이 든 이 시간에 나를 기웃거리는 부정을 남몰래 흘려 보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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