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콩트와 폭소
남편과 배꼽 잡고 웃는 일이 발생하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트루먼쇼의 주인공이라면 장르는 시트콤일 거라고. 덕질 중 최고는 가족 덕질이라고, 결혼 후 소셜미디어에 남편 관찰기를 쓸 때면 사람들은 꼭 육아일기 같다고 댓글을 달았다. 늘 빠지지 않는 해시태그는 #우리집에ENFP가산다 였는데, 남편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참나무를 심는 다람쥐처럼 자기도 모르는 새에 ENFP를 심어 싹을 틔웠다.
그리하여 두 ENFP와 INFJ가 함께 살며 찍었던 콩트의 순간을 남긴다. 모든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이 기회로 이곳에 기록된 기억만큼은 어느 날 문득, 또다시 폭소를 자아내는 해피바이러스가 되길 바라며.
인프제에게 엔프피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듯.
작은(그리고 큰) ENFP 육아일기
D+20
오후 9시. 아이가 밤에 잘 자다가 갑자기 엄청 크게 우에에엥- 한 번 울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다시 잤다. 아이가 깰 새라 남편에게 귓속말로 무슨 새벽닭 우는 소리 같다고 하니 자기는 박혁거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우리는 웃음을 뿜고 아이는 울음을 뿜었다. 재우자.
D+21
오후 1시의 대변 대참사. 직수 중에 아이 얼굴이 빨개지길래 보니 아이가 온몸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병원에서 기저귀 발진이 있었던 아이라 엉덩이 사수를 위해 남편과 둘이 지체 없이 화장실로 직행했다. 엉덩이 닦이고 잘 닦였나 확인하는데 항문에 대변이 그대로다. 뭐지?? 엉덩이에 얼굴을 들이민 순간 또 한 번 실시간 투척. 아 ing였구나…
D+22
오전 12시 아이 트림시키면서 나눈 대화.
"오빠는 밤에 아기 울음소리를 잘 못 들으니까 내가 바깥에서 잘게. (부부침대 위쪽과 오른쪽이 벽에 붙어 있는 구조라) 돌아나가야 해서 불편해."
"나 그러면 잠 못 자는 거 알잖아. 안쪽에서 자는 게 35살한테 스와들업 입힌 거라고 생각해 줘."
사방이 트여 있지 않으면 잠을 잘 못 자는 뉴본 남편의 적절한 비유에 바로 수긍.
D+22
오전 3시. 아이가 울어 새벽 분유 수유 담당인 남편을 깨웠다. 깊게 잠이 들어 일어나지 않길래 여러 번 세게 흔들었더니 홀린 듯 벌떡 일어났다. 수유하려면 옷을 입어야 한다기에 티셔츠를 주니 갑자기 아이 트림시킬 때 어깨에 가제수건을 걸치듯 티셔츠를 어깨에 걸친다. 왜 내친김에 등도 두드리시지? 내가 폭소하니 남편은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뜬다. 인간에게 잠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여러분.
D+24
오후 1시. 기저귀를 가는데 배꼽에서 피가 났다. 놀라서 소독 솜으로 톡톡톡 하니 피가 더 많이 났다. 소아과에서 배꼽에 거즈를 대고 방문하라고 해서 점심이고 뭐고 일단 출발. 의사 선생님께서 대뜸 배꼽 건드렸냐고 물으셨다. 소독만 했다고 하니 제발 그만 만지라고 하셨다. 정말 "제발"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자꾸 피딱지를 건드려 놓으니 딱지가 떨어져 피가 나고 딱지가 다시 생기고 악순환이라고 혼이 났다. 집에 오니 남편이 몸보신하라며 야심 차게 구워놓은 일등급 한우의 기름이 피딱지처럼 굳어 있었다. 그걸 보고는 둘 다 넋을 잃고 허허. 여러모로 배꼽 조심!
D+28
오전 1시 뉴본 남편의 재등장. 식곤증으로 수유하고 1분 만에 잠든 아이. 트림을 시키지 않으면 자다가도 종종 게워내서 아이를 깨워야 했다. (새벽 수유 때 뭘 해도 안 일어나는 남편처럼) 귀를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손 발을 흔들어도 요지부동이길래 간지럼을 태워보다가 간지럼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근데 왜 안 일어나지? 잠들면 간지럼을 안 타는 건가?"
"그런가? 내가 오빠 잠들었을 때 테스트해 볼게."
"모로반사로 널 때릴지도 모르겠는데 괜찮겠어?"
D+37
응애의 등장. 아이는 정말 "응-애-"하고 울었다. 남편은 '응'에 악센트를 둬 음을 높이고 '애'의 음을 급격히 떨어트리는 게 그루브가 살아 있다며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음악을 시켜야 한다나 뭐라나. 나는 그 연속된 그루브가 어쩐지 전쟁 영화나 게임의 배경음악처럼 비장하게 들렸다. 육아전쟁으로 여유가 없던 나는 "응-애-응-애-" 속에서 반쯤 감은 눈으로 딱 한마디를 했다. 기저귀나 갈자.
*
남편의 마음은 늘 미래에 가 있다. 아이를 재우기 전 기저귀를 가는데 확인도 안 하고 훅 뺐다. 비염이 있어 대변의 존재감을 눈치채지 못한 ENFP. 방수 매트를 넘어 거실 매트에 똥칠을 하더니 덩어리가 나뒹구는 바닥을 발로 밟았다. 그간 기저귀 갈이대의 흔적도 다 너였지?
*
무탈하게 100일을 향해 가고 있는 아이. 엄마가 사랑하는 친구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해 여러 형태의 사랑을 목격했다. 누나와 이모들이 주는 사랑에 헤헤거리더니 결혼식에 참석해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는 많은 이의 목적 없는 사랑 앞에 호기심 가득한 눈이 됐다. 할 말이 많았는지 집에 와서 아빠에게 옹알옹알 두 시간을 떠들다 겨우 잠이 들었다. 올해 초 언젠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어 브런치에 썼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다시 읽다가 곳곳에 뿌리내린 사랑의 마음들을 이토록 작은 존재와 함께 목격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작은 ENFP의 미래)
큰 ENFP 단독 육아일기
*
남편은 퇴근을 하면 현관에서부터 춤을 추며 들어온다. 방청객인 내가 행여 지금 이어폰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떤 노래인지 모를까 봐 친절히 허밍까지 하면서(들어도 무슨 노래인지 못 알아듣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결혼 초반에는 이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어떤 날은 배꼽 잡고 웃어도 보고 또 어떤 날은 쟤 왜 저래라는 표정도 지어봤지만 같이 즐기다 보면 지친 하루 끝에도 저절로 흥이 났다. 이제는 남편이 역에 내렸다고 하면 1열 직관을 위해 현관 앞으로 간다(요즘은 기어 다니는 작은 ENFP도 같이). 관전 포인트는 남편이 뚝딱이라는 사실인데, 음소거로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남편은 영원히 몰랐으면.
*
남편은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읏-챠!" 하고 외친다. 읏에 오르고 챠에 내려간다. 방지턱을 뒤늦게 발견하면 "읏챠읏챠읏챠!" 요란을 떠는데 꼭 자동차 전방센서 같다. 자동차 홀릭 작은 ENFP도 얼른 커서 같이 웃자.
*
계단 청소가 있는 날, 청소 업체가 청소 중 계단에 뿌려놓은 물에 남편이 미끄러졌다. 꼬리뼈보다 할부가 안 끝난 아이폰이 날아갔다며 운다. 기침할 때마다, 나한테 달려오려고 언덕을 뛰어오면서 꼬리뼈를 부여잡는 남편은 결국 자동차 엉뜨로 온찜질을 하러 집을 나갔다. 그 뒤로 남편은 계단만 보면 위기 탈출 넘버원을 찍는다. 아이가 태어나고는 발을 떼려고 발가락만 움직여도 조심의 ㅈ자를 꺼낸다. 그래서 붙여준 별명이 위(기)탈(출)넘(버원)!
*
남편은 잘 운다. 연애 때 <도가니> 영화를 보다가 좌석이 전동 시트인가 해서 보니 남편이 온몸을 사방으로 흔들며 울고 있었다. 이 파워 F형도 남자라고 무조건적인 공감엔 입력오류를 범한다. 내가 어디가 아프거나 무언가 마음이 힘들 때면 남편은 늘 "괜찮아?"보다 원인 찾아서 해결해주려 했다. 해결책보다 공감이나 위로가 필요하다는 말을 백 번쯤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있으면 "괜찮아?"를 먼저 꺼내게 됐는데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입력 오류로 대혼란이 온 로봇같이 굴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이와 같은 대화다.
"나 속이 안 좋네..."
"어제 또 뭐 먹었어? 아, 괜찮아?"
"ㅋㅋ"
멀티 플레이어로 나와 대화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면 로봇은 거의 폐기 직전까지 간다. 운전에 집중하며 대화를 하던 남편이 왼쪽 팔이 아프다는 내게 "괜찮아? 팔을 너무 안 써서 그런 거 아니야?" 뭐라고? 아직 감정에 대해 많은 걸 모르는 작은 ENFP는 내가 우는 시늉을 하면 웃는다. 그리고 계속 울면 그제야 내 얼굴을 살핀다. 조기교육 성공하겠지?
*
남편의 이상한 취미는 지하철에서 일등으로 내려서 일등으로 개찰구를 찍고 나오기다. 역에 지하철 두 대가 동시에 들어오면 바짝 긴장하고, 다른 열차의 문이 먼저 열리면 실망한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처럼 맨 뒤로 가는 남편의 축 처진 어깨가 굉장히 슬픈데 웃기다. 어느 날은 지옥철에서 소중한 신발을 지키는 방법을 알려줬는데 일명 손잡이를 잡고 중력을 이용해 힘껏 뒤로 기대기라고 한다. 그리고 궁둥이를 힘껏 트는 이상한 자세. 작은 ENFP는 요즘 거실 전체에 깔아 둔 매트에서 내려와 누가 앉기 전에 식탁 아래를 일등으로 선점해 그 자리에서 자동차를 굴리고 노는 재미에 빠졌다. 꼭 벽과 식탁 다리 사이 20cm 남짓한 공간으로 자동차를 굴리며 비집고 나오는데 남편이 보여줬던 궁둥이를 힘껏 트는 이상한 자세를 닮았다. DNA란.
*
종일 카톡과 인스타 DM으로 신기하고 웃긴 것들을 보내온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나를 티브이 앞으로 부른다. 오늘 나무위키에서 알게 돼 탭 파도를 타다가 발견한 유튜브 계정, 영상들을 선보이는 ENFP PT 시간이다. 흥미로울 때도 있지만 사실 속으로 이런 것까지? 할 때가 더 많다. 요즘 엄마껌딱지가 된 작은 ENFP는 잘 노는 것 같아 몰래 자리를 비우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엄마를 부른다. 그러다 곁에 가면 또 놀이 삼매경. 이 작은 아기도 놀이 브리핑을 하는구나.
*
남편이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갑자기 콘센트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재빨리 고무장갑을 건넸고 멀티탭을 뽑아버리자 폭죽 소리가 멈췄다. 안방에서 탄 내가 진동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 남편이 전기에 감전되면 어떡하지, 남편이 지금 나체인데 감전된 뒤에 119를 부르면 옷을 입혀야 하나? 그러다 나도 감전되면 누가 문을 열어주지? 별별 생각을 다했다. 얼마 전부터 기저귀만 갈려고 하면 나체로 도망 다니는 아이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 나는 평생 나체 인간들과 살 운명인 건가.
*
폭설로 약속이 취소됐다. 어디 갈까? 서울? 귀로는 남편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잘됐다를 외쳤다. 머리가 집 정리 리스트업을 뽑자마자 입이 포문을 열었다. 남편이 하나의 진영을 차지하고 허리춤에 양팔을 올려 보이며 허허실실 웃음 지을 때마다 이때다 싶어 또 다른 퀘스트를 줬다. 이것만 끝내면 나갈 수 있어, 희망을 품던 ENFP가 오후 두 시쯤 되니 며칠 물 주기를 잊은 화초처럼 바싹 말라갔다. 아, 망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고 이건 기념할 만한 날이다! 비상! 비상! 그제야 남편은 아이랑 마지막 날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고, 삐죽 나왔던 입에 대해 실토했다. 결국 남편 덕분에 아이와 그해 마지막 해 질 녘 풍경을 봤다. 작은 ENFP 역시 비가 와 나가지 못하는 날이면 찡얼거림이 늘고 축 늘어져 잠만 잔다. 그러다 날씨가 개 밖에 나가려고 현관 유아차에 앉히면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헤헤헤 소리 내며 웃는다. 이 정도면 무섭다 DNA.
*
산책하다가 소시지를 물고 있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살면서 문득 다시 깨닫게 되는 것들은 그만큼 무뎌진 게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그 마음을 다져온 시간이 단단해지는 게 아닐까?" 가끔 엔프피력을 접어두고 너무 뜬금없이 나보다 더 진지하게 군다. 그러다가 내가 지나치게 딥해지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기꺼이 가벼워질 줄 아는 무해한 사람. 이래서 내가 널 좋아했지 싶은 순간들의 기록.
+ 이 모든 시간이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남편, 아이와 함께하는 현재에 더 충실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