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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빈 Apr 25. 2024

울음과 진정


아이와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지나온 어떤 시절의 소리가 흘러간다. 가장 또렷한 소리는 울음이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에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아이였다. 새로움에 겁이 많아 사소한 것에도 촉각을 곤두 세웠고 남들은 쉬이 지나칠 작은 사건에도 울음으로 답을 구했다. 그럴 때면 대개 눈물을 떨구기도 전에 "엄마-"하는 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늘 의문이었다. 나는 어쩌다 울음과 마주해야 할 때면 엄마를 먼저 찾게 된 걸까.


갓난아이는 모든 의사표현을 울음으로 했다.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올 때뿐 아니라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편하면 "아아앙-"하고 앙칼진 소리를 냈다. 누군가의 울음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구나. 같은 상황이나 감정을 두고도 입장에 따라 저마다의 생각이 따른다는 사실을 부모가 돼서야 깨달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20일쯤 지나자 막혀 있던 아이의 눈물샘이 터졌다. 단순한 짜증이 아닌 진짜 울음에 이르러서는 아이의 눈 안쪽 구석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더는 참기 어렵다는 신호였다. 그제야 남편과 나는 아이의 감정이 끝까지 치닫은 음소거 울음까지 가지 않고도 짜증과 울음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다시 몇 주가 흐르자 아이는 정말 "응-애-"하고 울었다. 남편은 '응'에 악센트를 둬 음을 높이고 '애'의 음을 급격히 떨어트리는 게 그루브가 살아 있다며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음악을 시켜야 한다나 뭐라나. 나는 그 연속된 그루브가 어쩐지 전쟁 영화나 게임의 배경음악처럼 비장하게 들렸다. 육아전쟁으로 여유가 없던 나는 "응-애-응-애-" 속에서 반쯤 감은 눈으로 딱 한마디를 했다. 기저귀나 갈자.


그루브 넘치는 응애의 주인공은 6개월에 접어들자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 "아빠-"를 외쳤다. 두 양육자의 고른 사랑을 느끼며 자라서 그런지 아이는 엄마를 처음 말한 날 연이어 아빠를 외쳤다. 부를 때도 엄마아빠를 꼭 세트로, 마치 마법의 주문이라는 듯 연달아 외쳤다. 그럴 때마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안녕을 살피고, 안위를 돌봤다. 변화는 아이가 주 양육자를 구분하면서부터였다. 남편이 출근해 있는 동안 엄마랑만 붙어 있다 보니 아이는 자연스레 엄마를 먼저 찾았다.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오거나, 어딘가 불편할 때면 어김없이 "엄마-" 하고 불렀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아예 작정하고 "엄마---" 하며 울었다. 간혹 남편이나 다른 가족을 보고도 "엄마-" 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마법의 주문이 맞았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린 나는 낯선 세상에 서서 엄마를 부르며 이 소란스러운 마음을 진정하고 싶었구나. 엄마는 늘 히어로처럼 더는 울지 않아도 되는 해결책을 들고 나타났으니까.





이제 아이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면 습관처럼 "엄마-" 하고 외친다. 바로 나서서 해결해주지 않고 옆에서 가만 지켜보면 아이는 나를 한 번 쳐다보며 다시 "엄마--" 한다. 이때도 옆에서 잔잔한 어조로 말을 걸어주곤 하는데 경미한 짜증이라면 금세 진정이 된다. 결국 아이는 이 두려운 세계에서 안정을 줄 진정제 같은 누군가의 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아이를 보며 생각할 것이 많은 어른의 울음을 떠올렸다. 나는 학교에서 직장으로 이어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울음이 잦은 사람이었다. 어느새 엄마 품에 안길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울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참기가 답이라 믿었다. 숨을 참고 혀 끝을 누른 채로 울음이 집어삼키면서 응애도 엄마도 찾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다만 부작용이 따랐다. 누군가 앞에서 더는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그날도 그랬다. 산후조리원에서 아이와 함께 집으로 온 지 겨우 이틀차. 내 서른세 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한 달쯤 지나면 누구나 겪는다는 이유 모를 우울감. 이 모든 게 호르몬의 장난이라고 했다. 첫울음은 갓 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누군가 등을 두들기기 전까지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실은 소리 내어 울 수 없는 어른의 울음이었으므로. 모유수유를 하다가 갑자기 흐른 눈물이 기저귀를 갈다가, 남편의 얼굴을 보다가, 냄비가 어디 있냐는 엄마의 물음에 소리 없이 흘렀다. 잡채를 먹고 싶다는 내 한마디에 양손 가득 장을 봐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던 엄마는 낯선 딸의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초보 아빠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나를 다독이다 생일 파티를 하자는 장모님의 말에 초콜릿 케이크를 사러 떠났다. 그 사이 아이는 잠에서 깨 배가 고프다고 나를 따라 울었다.


아이를 낳고 내내 마음이 예민하게 굴었다. 순탄하게 자연분만과 모유수유가 가능할 거라는 희망은 유토피아였다. 유도분만에서 응급 제왕 수술도 이어진 출산과 쉴 틈 없는 조리원 생활,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잘할 수 있을까를 백 번쯤 물었던 퇴원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잘 준비했다고 믿었던 자신감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엄마가 돼도 되는 걸까 의구심만 늘 뿐. 여름에 태어난 아이를 케어하느라 체감 온도는 시베리아인데 엄마가 급하게 사온 BYC산 꽃분홍 내복을 껴입고 풀어헤친 단추 사이로 미약한 양의 모유를 겨우 아이에게 주고 있는 꼴이라니. 설상가상 몸은 움직일 때마다 삐걱 소리를 냈고 천골은 넌 영원히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못할 거야, 라며 못되게 굴었다. 급기야 나는 집에 온 사람들이 뭐가 어디 있는지, 아이가 왜 우는지 물을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나한테 묻는 거야,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파편처럼 사라졌다. 인내심 하나는 자신 있었던 나는 내 바닥이 이렇게 얕았구나, 생각하며 스스로에 치를 떨었다. 


아이를 안고 생일 초를 불자 엄마는 이제 좀 괜찮냐고 물어왔다. 그 말에 와르르 무너져 감정이 끝까지 치닫은 아이의 음소거 울음처럼 아프게 울었다. 놀란 엄마가 내 등을 쓸어내리자 갓 태어난 아이가 등짝을 맞고 울음을 토해내듯 엉엉 소리를 내며 울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 앞에 첫발을 떼려다 겁을 먹고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나는 이 소란스러운 마음을 진정하고 싶어서 아픈 소리를 냈다. 엄마는 남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조용히 자리를 떴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집으로 찾아와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얼마간 지키다 돌아갔다.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는 듯.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이따금 엄마에게 기대거나 투정조로 앓는 소리를 했다. 이렇게 다 커서도 실은 엄마가 필요했다는 말을 돌리고 돌려서.


나는 여전히 경미한 산후우울증 속에서 산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이처럼 엄마든, 남편이든 누군가를 붙잡고 소리 내어 울 줄 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지금 내가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어른도 때때로 울음과 진정이 필요한 법이니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한다. 내 육아동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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