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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Oct 29. 2015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14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

Whitsunday Islands, Queensland

Australia  



브룸스틱 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배 한가운데에 선 남자는 자신을 캡틴이라고 소개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얼리 비치의 날씨는 화창했고, 바람도 적당히 불고 있었다. 캡틴은 정해진 순서대로 안전을 위한 몇 가지 주의사항과 구명조끼 입는 법을 알려주고, 함께 승선한 선원들을 소개해 주었다.


뉴질랜드에서 온 타일러, 리사, 롤리, 벨기에 출신 피에르, 그리고 캡틴 아저씨, 조. 이어서 새하얀 갑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승객들도 돌아가며 소개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출신임을 온몸으로 외치는 스타일을 자랑하는 커플

너털웃음으로 같이 웃게 만드는, 휴 그랜트를 닮은 영국 아저씨 댄

오스트리아에서 온 워홀러 파비온

캐나다에서 온, 그래서 왠지 익숙한 랜

네덜란드에서 온 스타일이 정 반대인 커플

영국에서 온 엘레나

프렌치 스위스에서 온 스테파니

독일인가 벨기에에서 온 한 무리의 시끄러운 녀석들

독일에서 온 금발의 미녀와 찰리

영국에서 온...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누군가

그리고 한국에서 온 나와 김양까지.


2박 3일 동안 배위에서 먹고 자고 노는 휘트선데이 아일랜드 세일링 투어. 스무 명의 승객과 다섯 명의 선원이 작은 세일링 보트 브룸스틱 호에 승선했다.

  


승객의 1/4인 선원들을 기꺼이 돕기로 한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배를  출발시키는 것이었다. 지목된 댄, 파비온, 엘레나와 찰리가 손을 털고 일어나 캡틴 아저씨의 명령에 따라 착착 돛을 올리고 방향을 잡았다.


순풍이 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데려가는 동안, 각자 다양한 모양으로 갑판에 누워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즐겼다. 오후 늦게서야 (정말 예정해둔 목적지인지 의심되는) 망망대해에 멈춰 배를 세워두고 파도의 일렁이는 움직임을 따라 출렁거리며 저녁을 먹었다.


해는 언제 졌는지도 모르게, 핑크빛 구름과 밝게 빛나는 달과 별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깜깜한 바다는 낮에 받은 온기마저 빼앗아가려는 듯 냉기를 뿜어냈고 갑판에는 금방 물기가 서렸다.


밤늦도록 스며드는 냉기 때문에 배낭에 싸온 옷이란 옷은 다 껴입고선, 고래 뱃속 같은 선실 한구석에 새우처럼 쪼그려 잠이 들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캡틴이 온 배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깨워 갑판으로 올려 보냈다. 아직 어둑어둑한 수평선 위로 노란 기운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선원들이 배 안 좁디좁은 조리 공간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다들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해는 아주 천천히 올라왔다. 아주 조금씩 머리 위로 쌓인 여명을 밀어내고 바다 위로 올라와서는 포근한 구름 속으로 쏙 들어갔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는 일출보다는 일몰을 더 좋아한다. 연말이 되면 새해 첫 일출이 아닌, 가는 해의 마지막 일몰을 보려고 서해로 간다.


세상엔 그런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개냐 고양이냐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일출이냐 일몰이냐도 분명 중요한 질문이다.



이제 곧 화이트헤이븐
비치에 갈 겁니다.


아침을 먹고 갑판에 앉아있던 우리를 모아놓고 선원 타일러가 말했다.


"그곳의 모래는 유리의 원료가 되는 규석이 98%로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고 고운 게 특징이죠.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건, 절대로 모래를 가져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출국 길에 공항경찰이 이 모래를 짐에서 발견하면 마약보다 더 강하게 처벌할 겁니다. 알겠죠? 눈으로만 보고 느끼고 즐기고만 오세요."

      


아름다울 거라는 기대는 당연히 했지만, 화이트헤이븐 비치는 나의 기대를 우습게 뛰어넘었다. 환한 햇살도, 부드러운 바람도, 고운 모래도, 맑은 바다도, 주변을 둘러싼 섬들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람도 살지 않는 섬. 만들어진 놀 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서 뭘 할까 싶었는데 걱정은 기우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물에 정신을 뺏겨 한참을 걷고, 어린아이처럼 물속에 앉아 찰박거리다 따뜻한 햇살 아래서 책을 몇 줄 읽고 나니 약속한 3시간이 고운 모래처럼 스르륵 손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영원히 머물고 싶은 섬에서 벗어나 배로 돌아와 반짝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조촐하게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도 다양한 액티비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새 마른 수영복 위로 웜 슈트를 껴입고 예쁜 물고기들이 춤을 추는 다이빙 포인트에서 스노클링을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슈퍼맨처럼 엎드려 물고기들을 쫓아다니다 보니 시간은 또 훌쩍 가버렸다. 배로 올라와 물이 마르기가 무섭게 브룸스틱 호는 아주 아주 작은 모래섬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15분이면 끝에서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아주 아주 작은 모래섬에서 선원 피에르가 가져다준 풍성한 나초를 먹으며 두 번째 노을을 함께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알이 꽉 들어찬 투어였다.

비록 2박 3일 동안 단 한 번도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하지는 못했지만, 바닷바람과 바닷물에 절여진 상태로 선크림만 계속 발라 손톱으로 살을 긁으면 하얗게 긁어질 정도가 되었지만, 때로 떡진 머리나 선크림으로 반죽이 된 피부도 구원할 수 있는 풍경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팔자에 세일링이 어울리기나 하냐는 의문으로 시작한 이 투어는, 분명 우리가 여행 중에 한 최고의 사치였다. 그 사치는 비단 혼자였다면 절대 올 수 없었을 섬들에 발을 디뎌 본 것이나, 새로운  바닷속 세상으로 이끌어준 스노클링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잠시도 쉬지 않고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며칠 동안 해돋이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해, 하루 종일 햇살을 받고 갑판에서 훌륭한 저녁을 먹으며 노을과 달과 별을 바라본 것이 가장 큰 사치였다. 배에서 내린 후에도 며칠 동안 땅이 기분 좋게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온몸이 태양전지가 되어 따뜻한 기운을 가득 충전한 듯 오랫동안 뱃속까지 따뜻했다.


때로 인생에 사치는 필요하다.

설령 그 사치가 일상의 기본적인 것들을 앗아간다고 해도, 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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