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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Oct 27. 2015

가을의 시드니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13


가을의 시드니

Sydney, New South Wales

Australia



크라이스트처치의 작은 공항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긴장 속에 비행기를 탔다. 작은 비행기가 파닥파닥 시드니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참았던 잠이 쏟아져 내렸다. 단잠도 잠시, 비행기에서 내린 후엔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사람의 홍수에 휩쓸려 올라탄 공항 셔틀버스는 투어버스인 양 시드니의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크고 작은 건물과 사람들로 도시는 꽉 차 있었고, 눈에 닿는 모든 곳이 넓고 깨끗했다. 길을 잘못 들면 한참을 걸어도 물어볼 사람 하나 없던 일주일 전에 비하면 비약적 발전이었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자리는 비어 가고, 버스 앞뒤로 차는 점점 많아졌다. 차창 밖으로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여기가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이 맞는 걸까?

      




호주 제일의 도시 시드니는 유명한 이름에 걸맞게 영락없는 도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셔틀버스 투어가 거의 마무리될 때쯤, 목적지인 킹스크로스 역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서 듣던 해리포터 오디오북 때문인지, 짐을 길바닥에 내려놓고 잠시 마법 같은 기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거리는 허름했고, 각종 성인용품과 현란한 코스튬을 파는 가게가 늘어선 길 위로는 신발 대신 꿉꿉한 양말을 신은 노숙인들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머물 호스텔을 찾아 체크인을 한 후, 큰 가방을 이층 침대 밑에 안전하게 구겨 넣고 같은 방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인사는 밥에 대한 안부로 돌아왔고, 빵과 우유로 돌아왔다. 간단히 배를 채우고 씩씩한 척을 좀 한 후에 새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도시를 걸었다. 아직 익숙한 뉴질랜드 방식으로 남들보다 조금 느긋하게.


첫날부터 이상하게 죽이 잘 맞았던 호스텔 친구들과 며칠 동안 함께 도시 구경이 나섰다. 호스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빵과 시리얼로 아침을 때우고 거리로 나가, 분명 버거킹이지만 버거킹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헝그리 잭스에서 햄버거를 먹고 더 멀리까지 걸었다.

      


주말에만 열리는 패딩턴 마켓, 때마침 시작된 와인 페스티벌, 이름도 낯간지러운 달링 하버, 기대대로 사람들이 꽉 찬 차이나타운과 하버브리지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써큘러 키.


대낮에도 포섬이 눈에 불을 켜고 뛰어다니는 하이드 공원과 저녁이면 박쥐 떼가 십자가 탑 위로 날아가는 세인트 메리 성당. 10불에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간 스크러피 머피 레스토랑까지.


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이름과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 밀려들었다.



킹스크로스 너머로 해가 질 무렵에야 싸구려 샌들에 지쳐 부은 발로 숙소에 도착해, 하나뿐인 욕실에서 돌아가며 샤워를 하고 옥상에 모여 저녁 대신 맥주를 마셨다. 한국 이야기, 여행 이야기, 먼저 온 워홀러들의 영웅담과 모험기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술과 마약이 넘치는 매춘가로 전락한 킹스크로스는 여전히 그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밤새 춤을 출수 있는 클럽이 즐비한 곳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될 위험한 거리였겠지만, 막 호주에 도착한 우리에게는 그저 신나고 즐거운 곳이었다.


다들 앞일에 대한 불안과 설렘이 뒤섞여 들뜬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 내 마음도 풍선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제 여행은 그만두고 집에 가버릴까 고민했던 어두컴컴한 기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끈지끈한 편두통이 깊은 낮잠에 말끔하게 사라진 것처럼.


그해 가을, 킹스크로스에는 정말 어떤 마법이 깃들어 있었나 보다.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우리는 매일 웃고 떠들며 온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후 약속이라도 한 듯 뿔뿔이 헤어졌지만, 나는 아직도 그 가을밤을, 맥주와 모험담 가득하던 옥상을, 그리고 풍선 같던 마음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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