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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Oct 17. 2015

우리의 '토요타 코롤라'는 탈 많은 스무 살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05


우리의 '토요타 코롤라'는

탈 많은 스무 살

Tauranga, Bay of Plenty

New Zealand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카티카티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워킹 호스텔에 도착했다. 버스라고는 마을을 벗어나는 그레이하운드뿐인 시골에서, 일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교통수단인데, 워킹 호스텔은 일과 숙식은 물론이고 교통까지 해결해주니 여러 명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여도 나쁘지 않았다.


뭐, 적어도 호스텔 주인이자 우리의 유일한 통근 버스 운전수인 주인아저씨가 운전하면서도 술을 술술 마시는 술고래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호스텔에 묵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큰 키위 팩 하우스에서 일했고, 아저씨는 오늘은 맥주를 마시고, 내일은 위스키를 마시고, 우리를 아침저녁으로 실어 날랐다.


서울에서야 차로 15분 거리는 산책 삼아 걸을 수도 있는 거리지만, 카티카티에서 차로 15분 거리는 멋모르고 걷다가 로드킬을 당할 수 있는 길고 긴 고행의 길이었다. 음주운전으로 확 신고해 버릴까, 작당모의도 해보았지만, 결국 쉬쉬하며 각자 해결책을 찾아 떠났다.


용감한 한 친구는 헤드라이트 하나에 의지해 왕복 2시간이 걸리는 어두컴컴한 길을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고, 누구는 차가 있는 친구를 사귀었으며, 누구는 쓰고 버리겠다고 몇 백 불짜리 싸구려 차를 질렀다. 호스텔 주인의 만행에 분노한 옆방 친구도 단 돈 천 불에 차를 샀고, 나는 지도를 들고 그녀의 차 조수석으로 잽싸게 자리를 옮겼다.



우리의 첫 차는 1989년 생 토요타 코롤라였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얀빛은 전혀 바래지 않은 널찍한 스테이션왜건. 하지만 스무 살 코롤라가 얼마나 탈 많은 친구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어컨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기능이었고, 어디로든 출발만 하면 펑크가 나서 땜질을 하다못해 타이어를 2개나 교체해야 했다. 가끔 이유도 없이 엔진이 새서 길바닥에 뚝뚝 검은 피를 흘리기도 하고, 오르막길에선 속도가 10km 이하로 떨어져서 이러다 뒤로 굴러가버리는 건 아닌지 뒷골이 오싹했다.

      


이 친구를 데려온 비용보다 고친 비용이 더 많아질 지경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주) 큰 사고 없이 매일 우리를 일터로, 슈퍼마켓으로 실어 날라 주는 게 고마웠다. 하지만 뉴질랜드 종단 여행을 계획하면서, 우리는 이제 그만 이 탈 많은 친구를 보내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이 친구는 이미 일생에 해야 할 여행을 모두 한 듯, 우리와 함께 먼 길을 떠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조금만 달려도 툭하면 타이어에 구멍이 나고, 셋이 타고 있으면 완만한 오르막길에서도 낑낑대는데, 차마 모든 살림까지 가득 싣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함께 달리자고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주인의 손에 차 키를 꼭 쥐어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참 이상하게도 함께 여행을 한 열일곱 꽃청춘 토요타 칼디나보다 이 친구가 더 많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우리 모두의 애간장을 새카맣게 태우고, 차 주인을 비탄에 빠진 술꾼으로 만들었던 스무 살 코롤라는 늘 그렇게 순백의 하얀 모습으로 우리 기억에 남아 있다.


몇 번째 차를 갖게 될 때쯤에야 우리는 늘 천천히 달리던 새하얀 첫 차를 잊어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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