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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Oct 17. 2015

혼자만의 아주 이른 아침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06


혼자만의 아주 이른 아침

Blenheim, Marlborough

New Zealand




어제 온 언덕이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블레넘에 도착했어. 남섬의 맨 밑바닥에서 맨 꼭대기까지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나니 너무 지치더라. 혼자 배낭을 메고 가방을 끌고 멀리 걷기가 싫어서 정류소 바로 앞에 있는 호스텔로 들어왔어.

어제 받아서 아직은 새하얀 침대보 위에 조심스럽게 누워 밤새 틀어둔 노래를 이어 들으며 아침을 맞았지.


아무 할 일도 없는 곳에서, 할 것들이 머릿속에만 박혀서 시간을 보내. 이상하게도 그런 날은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다. 호스텔 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한데도 이런 날엔 왜 꼭 새벽부터 깨서는 다시 잠들지 못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딱히 갈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처리해야 할 일도 없는데. 4인실 방에서 혼자 이층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서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며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또 들어. 그러다 커튼 사이로 바람에 느리게 춤을 추는 나뭇가지와 잿빛 카펫 위로 번지는 녹색 햇살을 초점 없이 바라보곤 해. 더 이상 허리가 아파 누워있지 못할 때가 돼서야 침대에서 굴러 나와.


감지 않은 머리 위에 담요를 하나 뒤집어쓰고 방문을 열어보니 세상은 온통 새로운 빛으로 가득한데, 내 머리 위로만 먹구름이 따라다니며 비를 뿌린 듯 몸이 으슬으슬해.


다시 혼자가 되었구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돼.



이렇게 혼자만의 아주 이른 아침을 맞은 것이 언제인지. 분명 시작은 혼자였는데, 어느새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세포의 분열 과정처럼 사람이 사람으로 이어지면서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이렇게 혼자 서게 된 지금이 왠지 어색해. 그래서 조금은 슬픈 마음도 들어.


아침은 먹지 않아도 괜찮고, TV는 없어서 볼 수가 없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혼자서 아침을 먹을 마음도, TV를 볼 마음도 없으니까. 아직 아무도 사용한 흔적이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주방을 지나 테라스로 나가서 햇살이 가장 많이 쬐는 의자를 골라 앉아. 이제 곧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겠지. 저 푸른 포도나무들도 이 햇살에 발갛게 익어가니까.



분명히 혼자서도 곧 잘 지내게 되겠지만, 이른 아침에 혼자 일어난 오늘만 이대로 좀 더 앉아 있을게. 그리고 언젠가 모두를 다시 만나게 되면, 여기 앉아서 바라본 짙고 깊은 노을 이야기를 들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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