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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Oct 15. 2015

세상의 모든 시작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03



세상의 모든 시작

Somewhere Between Korea And New Zealand



지금 세상의 모든 시작은 한 비행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홍콩을 경유해 뉴질랜드로 파닥파닥 날아가는 비행기.


얄궂게도,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구름이 융단처럼 깔려 있고 늘 멀게만 느껴지던 태양이 가까이서 오렌지빛 온기를 내뿜어도, 비행기 탑승은 절대 유쾌하지 않다. 이륙할 때의 기분은 요상함 그 자체.


하늘에 떠 있는 동안은 지루함과 불편함과 불쾌함을 박박 비벼놓은 것처럼 된다. 잠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비행기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뱃속에 나비도 덩달아 춤을 춘다. 온몸을 고정하고 앉아 있는데도 구름을 밟고 온 하늘을 뛰어다닌 것처럼 피곤해지고, 육중한 티라노사우루스의 앙증맞은 앞발 같은 앞바퀴가 지면에 닿으며 착륙하는 동시에 피곤함은 안도감으로 바뀐다.


놀랍도록 오묘한 순간이다.

어딘가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느끼는 것은.

 

 

그렇게 경유지인 홍콩에 도착했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아저씨들이 가방을 들고 바쁘게 비행기 밖으로 사라진다. 갈아탈 비행기를 찾아 천천히 걸으면서, 그들이 검은 코트 자락을 날리며 허둥지둥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다.


여행의 시작에서, 나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물론 아르바이트이긴 했지만, 첫 직장이 될 수도 있던 곳을. 작은 사무실 안에서의 일과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한 야근 전 저녁식사 마저 좋아했지만,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면서. 이것도 하나의 슬픈 이야기다. 그들은 나를 필요로 했지만, 나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매일 아침 8시 반에 출근해 커피를 내리는 것이 지난 몇 달간 내 하루의 시작이었다. 간단하게 사무실을 정리하고 커피 주전자를 깨끗이 씻고 빳빳한 종이 필터를 새로 끼우고 잘 갈린 커피를 솔솔솔 뿌려 물 한 주전자를 졸졸졸 부어 넣으면 끝. 곧 부글부글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안에 향긋한 커피 향이 가득 차면, 그렇게 회사의 아침도 시작되었다.


평화롭고 향기로운 세상의 시작.


"벌써 일한 지 두 달 반이나 되었네요.

그럼... 이게 딱 50번째 커피 필터네요."


어느 쌀쌀한 월요일 아침, 그날도 어김없이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눅눅하게 젖은 50번째 커피 필터를 쓰레기통으로 조심스럽게 던져 넣으며 조금은 웃었던 것도 같다. 누군가의 하루는 눅눅한 커피 필터로 세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웃기다고도 생각했다.


난 아주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불행하지도 않았고,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커피 필터로 세어지는 삶에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엔 그 보다 더한 것들로 세어지는 삶도 있으니까.


하지만 대략 구십몇 번째 커피 필터를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떠나 홍콩 공항 한구석에 앉아 있다. 사람이 복작 거리는 공항에 홀로 앉아 내 여정의 시작에는 무엇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두려움인가?

아니면 설렘?

풍선처럼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클랜드행 비행기에 탑승해 달라는 방송에 조용히 새로운 자리를 찾아간다. 좌석 앞에 꼽혀 있는 잡지란 잡지는 다 읽을 듯이 열정적인 한 외국인 아저씨 옆에 앉아 멍하니 생각한다.


지금 내가 정말 뉴질랜드로 가고 있는 건가?


확고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이 모든 게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려 1년 전에 비자를 받아 준비했고 지금껏 뉴질랜드에 대해 보고 듣고 읽어왔지만, 놀랍게도 나의 여정의 시작엔 다 가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난무한다. 볼을 아무리 세게 꼬집어도 깨어나지 않는 꿈같다.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곤 어제 급하게 새로 산 안경 때문에 눈앞은 빙빙 돌고, 배가 아주 고프다는 것이다. 떠나는 마음가짐이란 게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과 아주 비현실적인 어떤 것 사이에 놓여 있다. 해도 해도 늘지 않는 건 이 마음가짐이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또한 그것뿐이다.

 

그러면 됐다.

이것저것 필요 없이.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

  

그 마음이 날 어디로든 가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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