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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20. 태풍에 익숙해지기

브런치북_다시, 제주


역대급 태풍,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태풍이라며 언론에서 난리입니다. 

바람이 너무 세서 달리는 차도 뒤집히고 가로등과 가로수도 뽑히며 서 있는 사람이 쓰러질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지역맘의 어느 댓글처럼

'공포영화가 따로 없네요. 영화는 결말이 궁금하면 빨리 돌려보기라도 하지.'

차라리 공포영화를 기다리는 게 낫겠단 생각까지 듭니다. 과연 그 정도로 쎈 태풍일까 반신반의하면서도 직접 겪어보지 않고선 섣불리 말할 수 없기에 그저 겸허히 기다릴 뿐입니다. 


제주살이 첫 해에 마주한 태풍은 지금도 역대급으로 기억되는 '볼라벤'이었습니다. 

제주시내 아파트에 살 때라 따로 마당이나 차고지 관리를 해야하는 건 아니었음에도 워낙 위력이 대단하단 소식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필수항목처럼 여겨졌던 창문에 신문 붙이기, X자로 테이프 붙이기까지 모두 완료한 우리 가족은 그 분이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제주를 향해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다는 그 분은 마치 영화 '죠스'의 굶주린 상어떼처럼 그렇게 서서히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린 마치 여름 성수기를 겨냥한 블록버스터급 영화상영을 기다리듯 이상한 흥분과 설레임을 동반한 채 볼라벤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네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단 것이냐? 나도 육지에서 태풍을 안 겪어본 사람도 아니고, 아 뭐 그렇게까지 내가 쫄아야 해? '

제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과 경기도에서 그간 겪었던 태풍은 그리 큰 위협의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권에 직접적으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예가 많지 않았고 툭하면 잠긴다는 저지대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어서 전 그저 좀 심한 장마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언론의 과장된 호들갑에 나까지 휩쓸릴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도 아직 태풍이 도착하기 전, 우리는 태풍으로 문닫는 식당을 전전하다 마지막 포장을 허락한 순댓국집에서 푸짐한 순대와 국물, 깍두기까지 포장해 와 온 가족이 둘러앉아 국밥을 떠먹으며 태풍을 기다렸습니다. 이른 저녁을 해결하고 문이란 문은 꽁꽁 닫은 후, 온가족은 거실에 모여 TV를 봤습니다. 아이들은 이내 잠이 들었고 곧이어 남편도 코를 골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던 전 휴대폰으로 시시각각 달리는 지역맘의 댓글들을 보다 드디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휘이잉~ ' 그 분이 오셨습니다.


휴대폰 불빛에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집앞 가로등 불빛 아래로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이중창 너머로눈 앞의 가로등이 휘청하는 것이 바람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정말 밤새도록 미친듯이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제 그만 좀."이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거센 바람이 멈추지 않은 채 밤새 불어댔고 전 그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일렁이는 가로등의 불빛을 보며 

'저 가로등이 기어코 뽑히겠구나, 그러면 우리 아파트를 덮치겠지, 저 무게면 이 창문을 뚫을 수 있을꺼야, 우리가 거실에 모여 자는게 아니었어, 지금이라도 아이들을 대피시켜야 하나, 그럼 우린 보상이나 받을순 있을까? '등등 상념은 춤추는 가로등처럼 긴 밤 내내 제멋대로 너울대고 있었습니다. 


긴긴 밤을 보내고 드디어 아침이 왔습니다. 여전히 바람은 미친듯이 불어댔지만 어김없이 먼동은 터오고 날은 밝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본 가로등도 꺼지고 밝은 곳에서 보는 풍경은 간밤보다 그나마 덜 위협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제야 "살았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간밤 사고소식이 속속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뉴스를 포함해 지역맘 까페에선 각자의 동네 소식들이 연이어 올라왔습니다. 어느 집에서 떨어져 나왔는지 모를 대문 한짝이 자신의 집 앞 골목에 놓여진 사진, 무너져 내린 지붕 소식, 떨어진 간판, 금간 유리창, 뒤틀린 아스팔트 사진까지 간밤 치열했던 곳곳의 흔적들이었습니다. 떨어져 나간 대문 사진을 보며 그제야 저는 실감이 났습니다. 

'여긴 육지가 아니구나. 난 지금 섬인 이곳, 제주에 사는구나.'


자연의 위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큰 물건들이 떨어지고 날라가고 몇 백년된 굵은 나무가 뽑히고 가지가 부러지는 와중에 집앞 가로등 밑에서 한없이 흔들리던 이름모를 꽃 한송이가 보였습니다. 바람에 어지러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없이 흔들리던 꽃은 그 강한 비바람에도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가늘고 여린 그 줄기로 참으로 유연하게 나부끼며 실같은 생명을 이어내었습니다. 아스팔트가 쪼개져 나가고 도로가 뒤틀린 중에도 이 가느다란 꽃송이는 미친듯이 흔들리면서도 건재했습니다.

'아, 너무 무거우면 너무 뻣뻣하면 부러지는구나. 작고 가볍고 유연한 것들은 살아남는구나.'

제주살이 첫 태풍이었던 볼라벤에서 전 여리지만 강한 생명력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찾은 제주.

여름이 되자 어김없이 또 태풍과 조우했습니다. 뜨겁고 활기찼던 태양을 마냥 즐기던 여름의 늦자락, 아직은 가을이 오기 전 어김없이 그분은 나타났습니다. 그리 역대급이라 할 수도 없었건만 오랜만에 만난 그분은 머리가 어질어질할만큼 우월한 존재감을 알려왔습니다. 하루종일 방망이질하듯 천장을 두드려대는 빗소리, 집안을 휘감아 도는 바람 소리가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울려댔습니다. 창문을 열수 없으니 갑갑했고 종일 바람 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문을 여는 순간 무지막지하게 들여치는 빗줄기에 결국 다시 현관문을 걸어잠갔습니다. 


2년전, 여름 만난 태풍의 집마당


모처럼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마당까지 나갔다 온 남편은 1분도 안 되는 그 찰나의 시간에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들어왔습니다. "이건 기념해야 돼" 어린아이처럼 태풍의 위력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며 방수팩에 카메라를 넣고 옥상으로 올라간 남편은 동영상을 찍는 그 3분 동안 홀딱 젖어 다시 들어올땐 상의와 바지를 걸레짜듯 쥐어짜 물을 떨궈야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제주의 여름은 태풍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직접적인 태풍의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 뿐이지 제주의 여름은 태풍 못지않은 수많은 폭우와 강풍들도 감내해야 합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코발트빛 바다로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고 보말을 잡고 조개를 줍던 여름을 즐겼다면 무지막지하게 몰아치는 이 태풍과 강풍도 함께 겪어줘야 하는 곳이 바로 제주의 여름입니다. 

'매미급, 볼라벤급에 버금가는 강력한 태풍', 여름만 되면 제주에 들려오는 태풍 소식은 이제 익숙합니다. 강한 태풍이든, 약한 태풍이든 태풍은 어쨌든 힘들기에 그보단 빨리 지나가는 태풍이기만을 바랍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위력,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빨리 지나가는 태풍이면 그나마 견딜만합니다. 사람이 걸어가는 속도만큼 천천히 지나가는 태풍처럼 밤과 낮을 꼬박 바람소리와 빗소리에 시달리다 보면 제정신이던 사람도 어딘가 이상해지게 되어버립니다. 


태풍 바비에 집으로 가는 길


그나마 제주살이 이제 어느정도 해봤다고 태풍 소식에 조금은 의연해집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다 혼비백산 놀래버렸던 기억과는 다르게 이제는 태풍소식이 들려오면 날아갈 것들은 미리 치우고 들여놓고 단속하고 조용히 집안에서 기다릴 줄 압니다. 안달복달해봐야 어차피 태풍은 제 갈 길을 갈 뿐이고, 때가 되면 머무르라 해도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가로등과 미친듯이 춤추는 나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마냥 걱정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조용히 집안에서 내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때가 되면 바람은 멈추고 언제 그랬냐는 듯 태양은 따사롭게 내리쬘 것이며 다시 사람들은 분주한 일상을 살아낼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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