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자영업하기_'발효의 시간' #5
지난번 올렸던 제주 첫가게 네번째에 이은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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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첫 가게의 새로운 주인은 운명처럼 그해 겨울에 나타났습니다.
평소 가입해서 활동했던 제주이주 모임 까페에 올린 글을 보고 온 부부는 당시 제주에서 식당을 해보고자 했던 자신의 지인에게 추천해주고자 가게를 찾았더랬습니다.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가진 그들은 단박에 넓은 창가와 창을 통해 보이는 한라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실은 지인에게 추천할 요량이었으나 이내 그들이 한번 해보자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저는 서둘러 건물주인과 이들을 연결시켜 주었지요.
적임자가 나타났지만 건물주의 허락을 받아내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의 1층으로 입주하면서 그녀가 원한 까페가 아닌 식당이란 사실에서부터 삐그덕거렸던 건물주와의 관계는 닥트설치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건물 외관을 망친다는 이유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에도 이런저런 트러블로 얼굴 붉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결국은 1년만에 가게를 팔고 나간다는 소식에 그것도 권리금을 받고 판다는 소식에 건물주는 못마땅함으로 입을 굳게 다문채 족히 일주일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제 속을 태웠습니다. 다행히 가게를 하겠다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판단하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마음을 돌리고 그렇게 주선한 첫 만남에 서로 좋은 인상을 주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자신의 건물에 처음으로 세든 가게로서 잘되기를 바랐던 마음에 신경도 많이 써 주었던 건물주였음을 이해하지만 여러모로 힘들었던 그 당시 저에게는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것조차 불편했었더랬습니다.
이후로도 몇 개의 가게를 운영하고 넘기면서 매번 건물주와는 사이 좋았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상복합건물과 상가건물, 가장 최근인 농가주택까지 건물유형에 상관없이, 건물주가 육지인이든 제주도민이든 또는 젊든 아니든에 상관없이 그들과는 늘 불편했습니다. 그 근본에는 유연하지 못한 제 성격도 있었겠지만 세입자와 건물주라는 관계가 결코 좋을 수 없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가게를 시작하기 전에는 작은 공간이라도 '내 가게'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가게를 해보면 쓰러져가는 건물이라도 '내 건물'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이 듭니다. 결국 지금 제주에선 '결국은 땅'이란 생각으로 작은 땅을 보러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게를 한다는 건, 특히 몇년 동안 오랫동안 한 곳에서 가게를 지속적으로 운영한다는 건 내 건물이 아니고서는 정말 힘들다는 걸, 소상공인이 임대료 내면서 돈이 모이기를 바라는 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해 12월 마지막날 꼬박 날을 채워 영업을 한후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모든 것을 넘기고 다음 해를 맞았을 땐 더이상 저는 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첫 가게와 이별을 고하고 제주에 내려가기 전에 살던 곳으로 다시 올라온 저와 아이들은 육지의 도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아파트 월세를 얻어 이사를 하고, 이삿짐을 다 풀지도 못한 첫날 아이들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가게터를 물색하러 동네를 몇번이나 돌았습니다. 큰 아이 고등학교 입학과 작은 아이 유치원 입학을 위해 원서를 접수하고 교복과 원복을 맞추고 게약한 가게의 인테리어를 위해 업자를 찾아다니고 중고집기를 사러 황학동에 드나들었습니다. 제주에서 몰던 낡은 차를 처분하고 왔기에 차도 없이 참 많이도 걸어다녔던 시기였습니다.
언제나 들소처럼 달렸던 제 인생이었지만, 그때가 가장 치열하게 한치의 빈틈도 없이 달렸던 시간이지 않았나 싶네요. 제주에 남아 일하겠다는 남편을 두고 두 아이와 살기 위해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었던 시간, 그 당시 저의 뇌 구조는 '모든 것을 다시 리셋한다'라는 구호 아래 빈틈없이 치열하게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2년만에 다시 올라온 육지의 봄은 을씨년스런 회색 건물과 황사로 뿌옇기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