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_17
그녀는 제주도에 있다.
이틀 전 그녀와 그녀의 친구는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왔다. 그녀들은 스쿠터를 빌려타고 제주 구석구석을 누비며 맘껏 자유를 느끼고 있다. 처음 타보는 스쿠터에 온몸이 뻐근하고 점심때쯤엔 해안도로를 달리다 커브길에서 넘어지는 사고까지 발생해 손바닥도 살짝 까진 상태다. 스쿠터를 끌고 산방산까지 올라왔을 때 해가 지기 시작했다. 예정에 없던 코스였지만 그녀들은 산방산 밑에 있는 작은 산장 2층을 운 좋게 빌렸다. 관광객이 어느 정도 돌아간 가을이라 그녀들은 큰 독채를 원룸 하나도 안 되는 가격에 빌려 모처럼 호사를 누렸다. 종일 스쿠터를 타고 누비며 바람을 맞은 터라 각자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곧 잠이 들었다.
딸아이였다. 분명 그녀의 딸인데 그녀와 헤어졌을 때 꼬맹이였던 아이가 훌쩍 자라 처녀가 되어 있었다. 아이는 그녀 앞에서 고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뱃속에 아이가 있다고. 그리고 자기는 이 아이를 낳을 거라고.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너는 너무 어려. 이제 겨우 열여덟살이라고. 얼마나 예쁠 땐데. 아이 때문에 네 인생을 발목 잡힐 순 없어."
"우린 사랑해. 사랑해서 아이를 가졌고 난 우리의 이 아이를 낳을 거야."
"아니야. 그건 너가 아직 너무 어려 뭘 몰라서 그러는 거야. 너가 할 수 있는 게 앞으로 얼마나 많은데. 지금은, 지금은 아니야. 엄마가 부탁할께. 아이를 낳아선 안 돼."
"왜? 난 이 아이를 버릴 수 없어. 이 아이를 낳아서 키울거야. 엄마도 결혼 전에 임신했잖아. 나는 왜 안돼? 그리고 난 엄마처럼 아이를 버리진 않아. 엄마는 내게 뭐라고 할 자격이 없어."
"아니야. 엄마는 너를 버린 게 아니야.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너도 나중엔 이 엄마를 이해할거야. 제발 다시 생각해."
그녀는 그녀의 딸아이에게 울면서 사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냉담하게 돌아섰다. 돌아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잡으려 애썼다. 잡히지 않는 아이를 대신해 그녀는 신께 빌고 있었다.
"하느님, 제발, 제발 이것이 꿈이라고 해주세요. 이 모든 게 꿈이라면 다시는 아이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다시 10년전으로 되돌려만 주신다면 남은 인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이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제발, 제발 꿈이라고 해주세요."
눈을 떴다. 천장을 응시하고도 한참을 여기가 어디인지 생각했다. 창문으로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꿈이었다. 천만다행히도 그것은 꿈이었다. 너무 힘을 주며 용을 쓴 나머지 온 몸이 욱씬거렸다.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딸아이의 모습이 선명한데 다행히도 그 모든 것은 꿈이었다. 그녀는 신발끈을 고쳐매고 바닷가까지 뛰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약속대로 그녀는 아이의 인생을 위해 그녀의 남은 인생을 던지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는 TV를 보고 있다. TV를 보던 그녀의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흐른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멈추지 않고 끝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TV속 그들 때문이다. 그녀는 MBC 다큐멘터리 '사랑'을 보고 있다.
젊은 두 남녀가 주인공이다. 대학을 나온 여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자, 그녀보다 나이가 제법 많은 남자,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깊이 사랑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여자의 암 소식을 듣는다. 다큐는 그들의 병원생활부터 밀착하여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여자의 죽음이 가까워온다. 암 세포가 전이되어 온몸에 종양이 퍼진다. 남자 앞에서 수줍게 웃는 그녀는 아직 너무도 예쁘고 젊은데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이 시청자인 그녀에게도 보인다. 죽음을 알면서도 그들은 결혼식을 강행한다. 죽기 전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싶다는 그녀를 위해. 결혼식을 하루 앞둔 전 날, 병실에 예쁘게 걸려있던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지 못한 채 갑작스런 쇼크로 그녀는 그대로 죽음을 맞는다. 여자의 죽음 앞에서 남자는 소리없이 통곡한다. 준비된 이별이었음에도 슬픔을 멈출 수 없는 그는 그대로 지리산 어느 자락으로 들어가 소리없이 오는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머리가 아플만큼 울었다. 그리고 반성했다. 그들의 사랑에 비하면 그녀의 사랑은 얼마나 보잘것 없고 이기적이었는가를. '한때는 사랑했노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가를. '사랑'이란, 주어가 '내'가 아닌 '그'인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내가 했던 사랑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내가'의 사랑은 아니었을까?
짧은 인생에서 어쩌면 인생은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부족한데 멀쩡한 육신을 가진 우리는 왜 그리도 서로를 미워하며 원망했어야 했는지 그들의 숭고한 사랑 앞에서 그녀는 지난 그녀의 사랑을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그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몇 번이나 그녀는 메일로, 또는 전화로 그의 모진 말들을 참아내야 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본인의 상황이 좀 나아지면 너그럽게 대하다가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예민하고 날카로와져 그녀에게 가시돋친 말들을 쏟아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을 뿐이다.
어찌보면 타이밍이 안 맞았던 것도 있었다. 그녀가 모처럼 마음먹고 전화를 하면 그가 예민하게 굴었고, 어쩌다 그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면 그녀 역시도 여러가지 일로 꼬여있던 터라 그에게 모진 말로 비수를 던졌다. 그녀가 한번 봤으면 좋겠다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땐 내가 왜 너를 봐야 하냐며 그가 모질게 굴었고, 그가 술기운을 빌려 그녀에게 전화했을 때는 지난일로 받은 상처가 풀리지 않던 그녀가 J에게나 전화해보라며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제주에서의 꿈자리 이후로 그녀는 결국 아이를 데리고 와야겠다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있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지난번 이미 한차례 경험했던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더 어려울 일이었기에 그들은 만나서 무엇이 아이를 위하는 것인지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녀는 친구와 함께 통영에 있었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번 보자 했다. 그녀는 통영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그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부터 꺼낼까를 생각했다.
그와 만나기로 한 날.
그녀는 어젯밤부터 아프다. 몸살과 무엇 때문인지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아 한밤중에도 몇 번이나 깼다. 으슬으슬 떨리고 식은땀이 흐르는데 변기통을 붙잡고 몇 번이나 꺽꺽대 봐도 음식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힘이 하나도 없었다. 새벽 3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시계를 보며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럼에도 결론은 가야한다로 굳어진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니까. 더구나 그 약속이 어렵게 잡힌 것이라면 더더욱.
휘청휘청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순간까지도, 그리고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는 그 순간까지도, 아니 타고난 후에도 고민한다. 과연 울산까지 갈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뒤돌아서 집에 가 누워 있고 싶다.
아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가다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리고 무엇을 위해 가는지, 무슨 말부터 할 것인지 그녀조차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잔뜩 흐린 날씨,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회색빛 하늘이 경부 고속도로를 가는 내내 전국에 깔려 있다. 고속버스에 오르자마자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쏟아진다. 침까지 물려가며 자고 일어나니 금강휴게소란다. 여전히 날씨는 흐려 있다.
정확히 다섯시간 후 울산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전화를 걸고 터미널 앞으로 마중 나온 그와 만났다. 그동안 차가 바뀌었다. 흰색에서 검정색으로, 승합차에서 중형세단으로. 얼굴을 마주한 게 2년만인 듯 하다.
"오랜만이네."
"그래. 오느라 수고했다."
침묵이 흐른다. 어떤 낯선 느낌은 없지만 그간의 공백으로 서로는 침묵의 거리를 둔다. 그리고 서서히 풀려가는 이야기들. 서로의 가족들 안부, 조카들 이야기, 하는 일에 대한 것까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의 올라가는 길을 그가 비행기표로 예매했다며 비행기 시간을 체크한 후, 그녀를 데리고 커피숍으로 향한다. 커피를 시켜놓고 둘은 마주앉는다. 차 안 옆자리에서는 잘 몰랐는데 마주보고 앉으니 얼굴이 많이 변했단 생각이 든다. 한때 어둡고 뒤틀려있던 인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많이 여유를 찾은 느낌. 그들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 그리고 예전 함께했던 시간의 공유된 추억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J 와의 일도 어느새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사이사이 서운했던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결론은 항상 그렇듯 '없다.'
그러나 이제 서로는 묵었던 감정의 앙금을 털고 좀 더 편안해진다. 그녀 역시 그때는 미안했다고, 철이 없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자기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서로의 자리에서 잘 살자고 그러기를 바란다고 서로는 말한다. 시간이 지나 서로는 정해지지 않은 또 다른 운명의 모습으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하며.
울산공항에서 그들은 헤어진다. 안녕을 고하고 돌아서는 그녀는 갑자기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다. 빈 속에 피로가 풀리며 현기증이 몰려온다. 비행기에 오르고 굉음을 내며 이륙하는 순간에도 멍하니 비행기 천장만 바라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우리는 참 많이 닮았구나.. '
그녀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제 당신을 예전처럼 미워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녀에게도 잘못이 있었다고. 그와 그녀가 진정 편안해지기 위해서 그녀는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침과는 달리 그녀는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