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_18
다시 봄이 왔고 또 다시 여름이 왔다.
그들의 관계에 달라진 건 없었다. 어린이날과 아이의 생일을 맞아 연락한 그녀에게 그는 지나치리만큼 차갑게 대했다. 그녀는 또 다시 상처를 입었고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입었다. 그녀도 지쳤다. 아이를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 싫은 거라면 이제는 정말 소식을 끊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이런 식으로는 온전히 버틸 수가 없었다. 지난 울산에서의 만남 이후로 이제는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그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그에게 분명히 전함으로써 그녀는 그녀의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을 각오하고 그녀는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해마다 유월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8년전 오늘, 진통을 했고 tv에선 월드컵이 한창이었지. 다시 또 아이의 생일이구나. 항상 당신에게는 메일을 보내는 것도 전화를 하는 것도 그 어떤 연락을 취하는 것도 내게는 버겁고 힘이 드는 일이다.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솔직히 이제 더 이상 당신의 모진 말들을 들어넘길 힘도 없다.
선물 보내는 것조차 원치 않는 건지 내가 소식 전하는 것도 아이에게 존재감을 알리는 것도 모두 원치 않는 건지 제발 서로 모른 척 살아주길 바라는 건지 정말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한 나를 이제는 정리하고 싶다. K
늦은 변명이지만, 너에게 전화 온 며칠전이 어린이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난 또다시 나와 내 딸이 엄마도 없이 그런 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엄마, 아빠와 손을 잡고 지나가는 애들을 볼 때마다 내 아이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너가 아이를 버리고 나간 날, 난 깨달았다. 너는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지난 5년여의 시간 동안 아이를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떨어져 살수 없어 포기해야 했던 몇 번의 좋은 기회도 있었다. 엄마도 없이 크는 어린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일을 택할 수는 없었다.
나도 당장 이런 날에는 네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를 끔찍이 위한다고 떠드는 나도 내가 상처 받는 게 싫다. 너나 나는 서로 누구를 위해 희생할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아이 앞에 네가 나선다는 건, 잠깐 널 만나고 나서 받을 아이의 상처 때문에 아니 솔직히 얘기하면 널 만나고 나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볼 자신이 내겐 없다. 그래서 아이가 더 클때까지 기다리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하겠다. 그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줬으면 한다. 이제 너나 내 입장이 아닌, 아이를 위해서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생각해 줬으면 한다. 내 생각이 짧다면 네 생각이 어떤지도 듣고 싶다. Y
둘이서 보내야 할 어린이날, 생일. 나 역시 예전 잠깐 아이와 있을 때, 아빠없이 보내는 그 서글픔에 만약 당신이 J와 있지 않았다면 함께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로는 어찌 그리도 빗나가기만 하는 것인지. 아이만을 생각하자.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결합만이 살 길이라 생각했고, 작년 겨울 당신을 만나자 했을 때 타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이를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당신 생각이 알고 싶기도 했고, 4년만에 만나면 어떤 느낌일지 일단은 만나봐야겠노라 생각했다. 다시 만났을 때 무척 편안함에 놀랐다. 난 당신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고, 서로는 많이 성숙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낙관했다. 그런데 전화를 건 나에 대한 당신의 반응, 보내진 메일에 대한 무응답, 무시에 마음이 상했고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안 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런 어긋난 마음으로 단지 아이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합친다 해도 세 사람 모두에게 더 큰 상처를 줄 것이라 생각하니 두려웠다. 무엇보다 서로는 당신 말대로 조금의 희생도 원치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 당신이 포기했어야 할 기회들, 그리고 감내했어야 할 고통들에 대해 내가 조금도 모른다 생각지는 말아주길. 내가 어찌해야 할까? 오히려 당신에게 묻고 싶다. K
많은 날들을 고민했다.인생이 계속되는 한 결론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고민 끝에 생각을 전한다.
지난 몇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다. 궤도를 이탈한 기차는 굴러는 가도 방향이 어딘지 몰랐다. 아직도 여전히 방향도 끝도 모르고 굴러만 가고 있다. 나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되돌리고 싶다. 너무 많이 지나온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솔직히 네가 원한다면 나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나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다. 아이가 9살이 되었고 나도 나이를 더 먹은 것 말고는 내 상황은 전혀 나아진 게 없다. 빈털털이에 불안정한 생활.
용기 있게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해 본다. 서로 노력하면 방법은 생기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도 해 본다.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고 서로에게 자신의 잣대로 요구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서로 용서된다면 노력해 보자. 무엇에서부터든. Y
그녀는 지금 울산 고속버스터미널에 다시 서 있다.
회사를 마친 주말 저녁, 버스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어둠이 깔린 역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그녀의 마음이 설렌다. 대학교때 그를 기다리며 서 있었던 때처럼. 시간은 흘러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10년이 지나 그들은 그때처럼 다시 연애를 시작하려 한다.
건널목 건너편으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그에게서 옅은 술냄새가 풍긴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 친구들과 한잔 했다고 했다. 그녀를 만나는 순간에도 그의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 왁자한 가운데 잘하라며 소리치는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려온다. 밤을 알리는 어둠 속에서 그들은 어색하게 서로를 보며 멋적게 웃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그가 앞장서서 모텔로 들어선다. 불륜도 아닌데 그녀는 멋쩍어 모텔비를 계산하는 그에게서 멀찍히 떨어져 문 밖만 바라본다. 어차피 오늘은 서울로 못 올라갈 터이니 자야할 곳을 미리 마련해주는 거라고 그 역시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모텔방에 들어간 그들은 어색하게 따로 앉는다. 그는 침대 위에, 그녀는 테이블 옆 의자에 앉는다. 침묵 속에서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낸다.
"뭐부터 말해야 할지. 미안하단 말.. 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먼저 얘기해줘서 고마웠고."
그녀는 말이 없다.
"다시 시작해보자는 말, 받아들인 걸로 알께. 내려와줘서 고마워. 앞으로 잘 할께."
사실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이미 숱하게 했던 많은 말들은 굳이 지금 이 시간 이곳에서 다시 꺼내어 곱씹지 않아도 서로의 인연이 아직 다하지 않아 다시 만난 것을. 지난 날을 꺼내어 잘잘못을 따지자고 온 건 아니었다. 그와 그녀, 그들은 아이를 위해 쉽지 않은 결정을 했고 그리고 다시 만남 속에서 너무도 닮아 헤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이 있을 뿐인 것을. 많은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 밤,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쌀쌀한 날씨가 다가 올 겨울을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가디건의 단추를 채워주었다. 그와 그녀, 그리고 그들의 딸아이는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재결합을 결정한지 4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그들 가족은 경기도에서 출발해 충청도와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까지 긴 여행을 했다. 그녀는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오피스텔의 짐을 정리했으며, 그 역시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각자의 자동차를 처분했다. 딸아이가 다니던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각자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후 큰 이민가방 한개와 캐리어 한개를 끌고 미국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전 그녀가 꾼 꿈처럼 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그때의 꿈과 달라진 거라면 그와 딸아이가 아닌, 그녀까지 셋인 가족 모두라는 점. 그들은 안내방송이 나오자 캐리어를 끌고 서로 손을 꼭 잡고는 탑승장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