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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나라의 어른이 Aug 23. 2021

스웨덴과 대한민국은 다르다..

목표를 이루는 자신만의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병원은 병이 있을지 모른다고 검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 병이 난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최선을 다하는 사회가 아니다.  스웨덴 사람들은 ‘최고를 추구하느라 스트레스받지 말고, 알맞게 딱 필요한 만큼 재량껏 하라’는 라곰의 삶을 선호한다. 그래서 스웨덴에는 숨차게 사는 사람이 없다. 라곰에는 무엇이든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소박하게 만족할 줄 아는 삶의 지혜와 행복 철학이 들어있다.”

 어느 날 아침 일간지 토요판에 연재되는 칼럼을 통해 얻은 새로운 생각들이다.  요약하면 스웨덴의 라곰과 같은 느리고 일과 삶의 균형이 있는 관점만으로 저들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우리와 저들의 차이에서 출발하는 제도와 정책이 다른 배경에서 나왔다는 것을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병원의 정의가 무엇이었던가 다시 떠 올려보았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서는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알아보는 곳'이라는 인식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코로나 팬더믹 초기에 스웨덴의 집단 면역을 추구한다는 정책은 그저 전염병을 안이하게 대처하는 것으로 비난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들 사회에서 병원은  병이 난 사람을 대응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구축된 사회이기에 잠재적인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선택했던 정책이었다.  물론 그 이후 그런 결정에 여러 평가가 이어졌지만, 아직 어떤 시스템이 더 우월한지는 머지않은 미래에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차이를 인식하고 상대의 정책과 판단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2050년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해서 정부의 고위정책결정자가 스웨덴의 수소를 활용하는 제철공정기술 ‘Hybrit’을 우리가 지향할 정책목표로 삼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북유럽 선진국가의 전략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그동안 일상적이었기에 많은 관련 정책지원 전문가들도 여과 없이 그들의 목표를 국가의 목표로 인용하여 빠르게 우리의 달성 목표로 제시하였다.   그런 비교가 합리적일까?   그들과 우리의 여건의 차이를 알아보았다.  우선 탈 탄소의 주요 대상 산업인 철강업의 규모를 볼 때 스웨덴은 연산 500만 톤, 대한민국은 약 7,200만 톤 수준으로 약 12배의 생산량 차이를 갖는 산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용할 수소를 생산하기 위해 탄소발생이 없는 그린 전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스웨덴은 특이하게도 산간 지형을 이용한 수력발전이 전체 전력생산비율의 45%가량을 차지하고, 보조적으로는 원전 비율이 30% 이상으로 이미 상당 부분 저탄소 전력생산기반이 조성되어 있다.  비슷한 지역이며 해안에 위치한 덴마크는 풍력으로 57%가량의 청정전력 비율을 가진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재생 전력에 대한 기반과 확장에 필요한 지리적 여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세계 10대 철광석 생산 및 수출국의 위상을 가진 독특한 자원부국으로 유럽의 중요 철광석 공급국인 스웨덴에 비해,  대한민국은 필요한 연원료를 100% 해외에서 공급받아야 하는 대조적인 상황을 인식해야 하는데 거칠게 벤치마킹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는 오랜 세월 fast follower 방식에 익숙하여 그것이 큰 장점이 되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제 우리가 지향하는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을 지향할 때 우리 고유의 선진국 다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다른 사회, 여건에서 생성된 가치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우리만의 사회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대개 ‘우리가 바라는 것(what we want)’과 ‘그 ‘목표를 이루는 방식(how to get)’을 구별하는데 혼란함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에 적당한 것보다는 열정을 다하여 최선을 추구하되, 어느 분야에서도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며 살아야 하는 가치 하에서는 접근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의 여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이고 단순한, 목표지향적인 방향 설정이 아닌, 최선을 다해 합의, 조정하면서 희생할 수 있는 창조적인 접근이야 말로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최선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안정감, 여유 그리고 개인의 가치와 행복추구가 보장되는 사회로서 우린 북유럽 사회를 대체로 동경한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와 차이를 먼저 가다듬어 보고, 그런 포괄적 지향을 위해 차별적인 접근방식은 어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북유럽의 오늘이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6, 70년 전 치열하게 서로의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치렀던 노동운동과 정치분열 등 아픈 흔적과 통합의 몸부림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정서를 설명하는 '얀데의 규범(Jahnetelagen)'을 인용해 본다.  얀테의 규범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덴마크 출신의 작가 악센 산테 모세(Axel Sandemose) 소설에서 처음 나왔으며 '얀테'라는 마을의 사람들이 지키는 11가지 도덕률이다.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고민했던 과정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므로 몇 번을 읽어 보아도 좋을 잠언이다.


1. 당신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2. 당신이 다른 사람만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어떤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마라

9. 누군가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10.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뭔가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11. 우리가 당신에 대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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