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나라의 어른이 Aug 22. 2021

이명으로 괴로운 남편, 코골이를 부인하는 아내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와 나만이 들을 수 없는소리 사이에서

 

  얼마 전부터 내게만 들리는 이명이 인지되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 기이한 소리에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방송에서 들었던 어느 유명인이 오랜 세월 그 소리를 견디며 사는 것이 힘겹다는 경험담을 들었을 때 그저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게만 들려오는 그 낯선 소리는 그로부터 점차 내 안의 소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인식하면 할수록 더 또렷이 들려오는 그 소리에 대해 평소 신뢰하던 전문의를 찾아 표현해하기 힘든 그 소리의 모양새를 설명해야 했다.  예전에 공중파 방송이 끝난 뒤 들을 수 있는 일정하게 들리는 TV 소리 같기도 하고 끄지 않은 기계장치 소리와도 닮아 보인다고.  하지만 병원 간판 제일 앞에 써놓은 ‘이명 치료 전문’이라고 주장해 온 그 병원의 구호와는 달리, 의사는  ‘그거 잘 치료되지 않는 것이니 잘 사귀며 살아보시는 것이 어떤지..’라고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이젠 이 소리가 가끔 몸이 더 피곤을 느끼거나 몸살이라도 찾아오는 시기에는 여지없이 자신의 존재를 곧바로 알리는 신호수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요즘 나의 신체 상태를 가늠하는 센서로 활용하고 있게 되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살펴보니 내가 진단을 받은 4000Hz 주파수영역에 서 기능 상실이 생기면 인체는 그 영역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소리를 듣고 있다고 뇌에게 주장하는 현상이라는 설명을 들어 본 기억이 있다.   들리지 않기에 불안한 우리 몸은 자신이 잘 듣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간혹 의사나 아내를 포함한 가까운 주변인에게조차 고통을 호소할 때 상대방의 뜨악한 표정을 보면 실망스럽다.  짐짓 상대는 예의를 갖추어 그 소리를 아는 것처럼 표정을 짓는데 경험하지 못한, 아니 얼마나 괴로운지 내 고통에 공감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까끔 그들을 위선적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아내에게는 오래전부터- 아마 신혼 무렵부터- 코골이가 있었다.  젊기도 하고, 또 비만과 술고래인 중년의 남성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소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졌던 무절제한 인물의 은유로 사용되었기에 그녀와 내게 모두 의외의 현상이였다.  진찰을 받아보니 유전적으로 코뼈 기형에 의한 것이라는데, 돌아가신 장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내의 두 살 터울의 언니에게도 같은 고백을 들었다니 이것 역시 치료 대상이 아닌 받아들여야 할 운명임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정작 아내 자신은 코를 골지 않는다고 주장하곤 하였다. 자신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데 공연히 놀린다고 버럭 화를 내기도 하였다. 타인에게는 명확하게 들리는 그 큰 코골이 소리를 정작 자신은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은밀한 소리 이명과, 나만이 들을 수 없는 코골이는 기이하게도 우리 부부에게서 나타났는데 공교롭게도 나만이 그 모든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이 두 가지 소리는  지독히 자신에게만 향하거나 오로지 타인에게만 들린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명과 코골이 중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일까 하는 질문을 하던 누군가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에게는 별다른 불편이 없는 코골이 일 것이라고 자문자답도 이어갔다. 철저히 자신이 중심이 된 관점에서 보면 이명은 피하고 싶은 선택임이 틀림없다. 

  내게만 들리는 그 소리는 그래서 분풀이 대상을 찾을 수도 없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가 존재하는 그 어떤 때와 장소에 불쑥 찾아온다.   나만 듣는 소리는 이런 일정한 음정의 고장음뿐만은 아닐 것이다.  끝없이 속에서 울려오는 욕망과 부추김, 때로는 질책과 위로의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올 때가 많았다.  오히려 이즈음의 이명과 같은 잡음은 명백히 구분 가능하지만, 내면에서 찾아오는 소리는 예고 없이 내 삶 속으로 불쑥 파고들어 온 적이 많았다. 어쩌면 내 인생 후반에 찾아온 이명현상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겪어온 여러 내면의 소리가 집약되어 한 가지 주파수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고요한 밤, 잠자리에 들어설 때 방문하는 그 소음으로 인해 더 이상 산만하게 찾아오는 상념을 걱정하지 않고 오래된 친구처럼 맞이한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서로 다른 소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예민해진 나의 이명을 관리하기 위해, 또 자신의 통제할 수 없는 코골이로부터 상대를 보호하기 위한 명분과 근거를 가지고 이미 오래전부터 각자의 방을 소유하고 있다.    여전히 아내는 불연속적인 코골이가 여전하여 이명으로 잠을 설치는 나와는 여간해선 방을 같이 쓰지 않는다.  어쩌다 방문한 손님을 위해 자신의 방을 양보한 후 여느 부부처럼 함께 잠을 청할 때면 여지없이 들여오는 그의 대담한 웅변 소리? 에 넌지시 옆구리를 찔러 자세를 교정시키며 잠을 청하는 여유를 갖고 산다.


이전 06화 편견과 범주화(Categorizatio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