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선에 새로운 기종 보잉 777이 보급되었다. 그 동안 인천-암스테르담을 오갔던 747기종은 너무 오래되어 승무원인 나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낡은 천장과 벽면으로부터 나오는 엄청 큰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안전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새 비행기를 타는 것은 마치 새 아파트에 입주하듯 신나는 일이었지만 각종 새로운 안전기구의 작동방법을 익혀야 하는 등 귀찮은 보수교육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동안 꼬박 긴장 속에서 진행된 교육을 마친 후 이틀간의 꿀맛 같은 휴가가 보너스처럼 주어졌다.
아침 일찍 출발해 하루 종일 즐기기로 작정 한 곳은 '더 호에 벨루에'De Hoge Veluwe국립공원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더 호에 벨루에'는 네덜란드어로, 직역하면 '높은 지대에 있는 휴경지'라는 의미로 원래는 개인소유의 사냥터였다. 공원의 면적은 약 1,660만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20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동기언니 2명과 함께 이 네덜란드의 대표적 국립공원을 탐험(?)하기로 했다. 날이 밝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숙소에서 공원까지 대충 시간을 재보니 2시간 남짓 걸릴 것 같았다.
더 호에 벨루에 국립공원 입구에는 흰색 자전거가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고맙게도 사용료는 무료였다. 눈에 들어온 자전거 한 대를 끌어내 올라타보니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자전거 안장을 최대치로 내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저것 꼼꼼히 고르고 골라서 겨우 마음에 드는 자전거를 끌고 도로로 나섰다. 손잡이 브레이크가 없고, 페달을 뒤로 회전해야 멈출 수 있는 이 생소한 네덜란드식 자전거는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 5분 투덜거리다 보니 금방 이 낯섦에 친숙해졌다.
숲으로 조성되어있는 공원 초입을 지나 드넓게 펼쳐진 평원으로 우리는 달렸다. 황량하기까지 한 평원에는 모래와 관목들, 그리고 누렇게 말라붙은 풀들이 사막 같은 들판 위에 무리 지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로 아득하게 이어진 자전거도로가 어서 오라는 듯 우리를 부른다.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동차를 걱정할 것도 없고, 길을 벗어나 넘어지더라도 펑퍼짐한 풀밭이라 다칠 염려도 없다. 어디론가 무조건 달리고 싶은 마음을 바퀴에 전이시키며 힘껏 페달을 밟았다. 30분 정도 달렸을까? 평원이 끝나고 숲길이 나타났다.
숲길이 시작되면서 현대식 건축물이 나타났고 그 동안 아무도 없었던 우리들만의 천국(?)에 낯선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이곳이 반 고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우리가 사전 인지하고 있었던 크뢸러 뮐러Kröler-Müller미술관이었다. 이곳은 암스테르담 뮈죔 광장Museumplein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이어 두 번째로 고흐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매표소에서도 10km나 떨어져 있어 자전거를 타는 수고스러움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었다. 미술관 입구에 도착하니, 이미 도착한 방문객들이 놓고 간 자전거들이 거치대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도 한쪽에 자전거를 거치해 놓고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유럽에서 발로 차이는 곳이 미술관인데 굳이 여기까지 와야 하는지?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막상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와 마주친 순간 수고의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아를Arles의 밤은 낮에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밤이 오면 광장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포석은 보랏빛을 띠고, 하늘은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변하는 것이다. 여행자가 되어 무심코 지나쳤던 광경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광경들을 <밤의 카페 테라스>는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밤, 카페, 사람 그리고 별… 지금 나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이 뭔지 모를 희열은 무엇인가? 비록 고흐는 아를에 정착하여 자주 찾던 단골 카페에서 이 그림을 그렸겠지만,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지금, 낯선 여행지에서의 어느 카페 테라스에서 동화 같은 이국적 정서에 흠뻑 취해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의 정서와는 다르겠지만, 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며 고흐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경이적인 예술혼에 스스로 취해버리지 않았을까!
이 밖에도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룰랭 부인의 초상>, <룰랭의 초상>, <마담 지누의 초상>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네, 르누아르, 고갱,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작품들이 빼곡했다. 음식으로 말하면 나는 엄청난 미식(美食)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과식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굳이 미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자연과 더불어 즐기는 미술관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미술관 끝자락에 하얀 천막으로 설치한 야외 카페가 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한들거리며 부드럽게 뺨을 스치는 바람과 새소리를 즐기며 우리는 때로는 떠들고, 때로는 침묵하며 한없이 자애로운 자연을 만끽했다. 하지만,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가야 할 여정이 많이 남았기에 아쉽게도 우리는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리고는 태양에너지를 몸으로 받아서 나오는 동력으로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미술관을 뒤로하고 달렸다. 햇빛이 쏟아지고 주변은 적막했다. 아무도 없는 광활한 자연 속에 우리 셋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자연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할말을 잃었다. 그렇게 쭉 달리다가 갑자기 펼쳐지는 지평선에 놀라서 멈춰 서기도 했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우리는 또 달렸다. 끝이 안 보이는 초원, 울창한 숲, 황막한 들판.. 그리고 파란 하늘. 우리는 자주 자전거를 멈추고 그 진경들을 바라봤다.
우리가 더 호에 벨루에 공원에서 둘러본 곳은 공원의 전부가 아니었다. 자전거 도로가 나있는 지역의 일부에 불과하고, 공원에는 그 외에 캠핑장과 동물들이 뛰어 노는 구역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을 둘러보려면 며칠이고 단단히 계획하여 실행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 계획 없이 용감(?)하게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던 우리에게는 앞만 보고 달렸던 자전거 길이 여정의 전부였다.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에 우리는 가까운 게이트로 나와 기나긴 하루의 여정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