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행복을 찾아서 떠난 여행

[행복을 찾아서]

by Changers

오랜만에 가진 여유로움이 너무 좋았지만,


혼자 집에 있는 것은 너무 어색했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했던 것은 혼자 여행하기였다.


특별한 곳으로 가지는 않았고,


그리운 따뜻한 집밥을 먹으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너무 반갑게 나를 반겨주셨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며칠 푹 쉬어라."


"네, 그러려고요. 며칠만 쉬다가 올라갈게요."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집밥을 먹고 잠시 쉬려고 소파에 앉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밤새 여러 가지 꿈을 꾸면서 한참을 잔 것 같다.



다음날,


내 몸이 이상했다.


온몸에 통증이 정말 심했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을 만큼 아파도 힘이 없었다.



2년 가까이 엄청난 긴장과 압박 속에 살다가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이 풀려서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꼼짝도 못 하고 집에서 강제 요양을 했다.


사육을 당하듯이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한 것 같다.


덕분에 내 얼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거대하게 부풀어있었다.



며칠 뒤, 어린 시절 동네로 갔다.


19살 12월까지 살던 집이 보고 싶었다.


난 운이 좋아서 능력이 좋으신 할아버지 덕분에 태어날 때부터 마당이 있는 집에서 자랐다.


마당에는 배나무, 포도나무, 은행나무, 파초 등등이 있었고,


때때로 우리가 먹기 위해 호박, 감자, 고구마는 재배하셨다.


수확을 하면 응팔의 한 장면처럼 동네 친구네 집에 가져다주곤 했다.



초등학교 이전에는 개 한 마리를 키웠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종의 개가 있지 않았다.


그나마 진돗개이거나 아니면 일명 똥개뿐이었다.


이름은 '방울이'였는데, 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었다.


나와 내 동생을 끔찍이 챙겨주던 방울이는 내가 가위로 털을 싹둑 잘라도 묵묵히 내 친구를 해줬다.


내가 12살이던 무렵, 몸이 많이 아파진 방울이는 농장 같은 곳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들었다.


며칠 동안 펑펑 울면서 행복하라고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고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방울이의 기억이 조금 흐릿해질 때쯤 아버지는 진돗개 1마리를 데리고 오셨다.


수컷이었고, 이름은 진이었다.


진이는 아버지에게는 정말 순종적이었지만 나랑 내 동생에게는 물려고 덤벼든 적이 몇 번 있었다.


우리한테 왜 그랬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 어딘가가 아픈 게 아니었을까 싶다.



몇 달 뒤에 진돗개 1마리를 더 데리고 오셨다.


암컷이었고, 이름은 순이였다.


순이는 이름대로 정말 순했다.


항상 우리에게 꼬리 치며 다가왔고 방울이만큼 우리와 가깝게 지냈다.



IMF 이후 형편이 안 좋아지면서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


이사 갈 집에서는 개를 키울 수가 없었기에 진이를 농장으로 보냈다.


순이는 이사를 가기 몇 달 전에 갑자기 가출을 했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하늘의 별이 되었을 방울이, 진이, 순이를 나중에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대부분의 친구들은 부모님이 일을 하셨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부모님은 안 계시고 친구만 있었다.


친구들이랑 레슬링을 보거나 오락기로 게임을 하거나


밖에 나가서 다른 동네 친구들과 다 망구, 진돌, 고무 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빈부의 격차는 있었다.


나는 정원에 딸린 집에 살았지만, 내 베프 중 한 명은 방 1개, 다락방 1개, 공용 화장실을 써야 하는 집에 살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월의 대상도 아니었고,


친구가 되는데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다.


그냥 언제나 함께 신나게 노는 친구,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부모의 재력이 아이들을 갈라놓게 되었는지...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내 어린 시절 모든 추억이 담긴 집과 동네에 서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언제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그 시절 우리 부모님보다 내 나이가 많아졌는지 속상했지만,


그런 소중한 추억이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너무 궁금했다.


등굣길은 어떤지, 학교는 여전히 그대로인지, 교실은 어떤지 말이다.


등굣길은 시멘트 길이 아니라 아스팔트 길로 바뀌어있었다.


학교 안에는 들어가려는데, 경비 보시는 분께서 못 들어간다고 막으셨다.


그 당시 초등학생 대상 범죄가 사회적 이슈가 되던 시가라서 안된다고 하셨다.



"저 이 학교 졸업생인데, 정말 오랜만에 학교가 너무 궁금해서 왔습니다.


잠깐만 보고 가면 안 될까요?"


"원래는 안되는데, 잠시만 보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방과 후 친구들과 매일 축구를 하던 운동장과 축구 골대는 그대로였다.


구름다리, 씨름장, 등나무 등등 20년 전 내가 다닐 때 모습 그대로였다.


교실도 거의 그대로였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한 학년에 2반까지 밖에 없었다.


내가 다닐 때는 9반까지 있었고, 한 반에 50명 가까이 있었는데 말이다.


저출산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매일 밤마다 움직인다고 친구들과 얘기했던 세종대왕 상과 이순신 장군 상을 뒤로하고,


교문을 빠져나왔다.


교문 앞에는 책장이 조금씩 넘겨지는다는 남매 상도 그대로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한 번씩 들렀던 문방구는 여전히 있었지만,


예전처럼 뽑기와 불량 식품이 없는 것은 아쉬웠다.



지금은 다들 마트에서 장을 보지만,


내가 어릴 때는 마트라는 것은 없었다.


어머니는 항상 시장에 가서 장을 보셨는데,


지금은 서동 미로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관광상품화가 되어 있었다.



서동 미로 시장에는 유명한 명물이 하나 있다.


계란 만두라는 것인데, 부산 어디에도 전국 어디에도 없다.


서동 미로 시장에만 있다.


시장의 중간쯤 가면 가게가 있었는데,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계란 만두에는 떡볶이 국물을 올려서 먹어야 제맛이다.


어릴 때는 한 개 200원이었는데, 지금은 2000원이라고 했다.


뜨끈한 어묵 국물과 함께 계란 만두를 먹었다.



그리고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계란 만두 집 근처에 호떡집이다.


근데 그때 할머니가 아직 계셨다.


"안녕하세요. 아직도 장사를 하시는군요.


이 호떡이 너무 먹고 싶어서 서울에서 왔습니데이."


"아 그래요? 맛있게 드세요."


"잘 묵겠습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잘못 먹으면 뜨거운 설탕물에 혀가 데기 때문에 호호 불어가면서 잘 먹어야 한다.



이제 다시 집으로 가기 전에 어릴 때 자주 가던 오락실을 가봤다.


안타깝게도 이제 오락실은 없었다.


더 이상 오락기 위에 동전을 올려놓는 수동 예약 시스템을 경험해 볼 수 없다니 속상했다.



그렇게 내 어릴 적 동네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나의 30년 지기 동네 형들이 생각났다.


1명은 인천에 있어서 보기가 어려웠고,


나머지 2명에게 연락을 했다.



"햄아, 잘 지내나?


오랜만에 부산 왔다가 생각나서 연락했다.


오늘 시간 되나?"


"오늘?"


"응, 오늘. 너무 갑작스럽제?"


"아이다. 오늘 된다. 이따가 보자."



갑작스러운데도 연락하면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이.


나이는 다르지만 부x친구 형들이다.



어릴 때 동네에서 봤으면 좋았겠지만,


그 동네에는 특별히 먹을만한 곳이 없었다.


우리는 동래에서 만나기로 했다.


동네가 아닌 동래.



저 멀리서 형들이 온다.


"와. 진짜 오랜마이네."


"잘 지냈나?"


"부산엔 무슨 일이고?"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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