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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나를 알아가는 시간]

by Changers

현재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석촌호수입니다.


2021년 12월에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석촌호수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곳입니다. 석촌호수 근처라서 이사 온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하다가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찾아서 이사를 왔더니 석촌호수가 집 근처에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석촌호수가 최애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이사 온 후 월드타워와 롯데백화점을 가기 위해서 몇 번 간 적은 있지만, 석촌호수만을 위해서 간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호수가 집 근처에 있구나 수준이었습니다.


2022년 1월 24일 러닝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어디서 러닝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일반 도로를 뛰는 것은 매연도 많고,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집 근처에 뛸 수 있는 공원이 있는지 찾아봤습니다. 석촌호수공원과 올림픽공원이 있었습니다. 둘 중 집에서 더 가까운 석촌호수공원을 선택했습니다. 러닝을 하고 출근하려면 조금이라도 집에서 가까운 곳이 꾸준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석촌호수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석촌호수는 동호와 서호로 나뉘어 있는데, 크게 한 바퀴의 거리는 2.5km나 되었습니다. 동호는 1.15km 정도이고, 서호는 1.35km 정도 됩니다. 러닝을 처음 시작했을 때 1km를 뛰었기에 동호 한 바퀴를 채 못 뛰었습니다. 솔직히 1km가 뛰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매주 100m씩 거리를 늘려가다 보니, 동호만 2바퀴 이상 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매번 동호만 뛰는 것이 지겨워질 때쯤 서호 뛰기를 도전했습니다. 지금이야 서호 거리가 몇 km인지 알지만, 그때는 알지도 못하고 무작정 뛰었습니다. 살짝 겁도 나고 해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가다가 중간에 멈췄을 때 돌아오는 길이 조금 멀더라도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갔었습니다.


서호에는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매직 아일랜드가 있습니다. 동호와는 또 다른 뷰가 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서호 수변무대에서 바라본 매직 아일랜드와 월드타워의 뷰는 동호보다 훨씬 예뻤습니다.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러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석촌호수공원 전체를 뛰기 시작했습니다.



러닝이 끝나면 꼭 하는 루틴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석촌호수에서 꼭 해야 하는 것이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석촌호수 동호의 한 전망대와 서호의 수변무대에서 바라본 월드타워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석촌호수 동호와 서호의 모습을 매일 1초씩 담는 것입니다.


첫 번째 루틴을 하게 된 이유는 러닝이 끝난 후 기록과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엔 혼자 간직하는 용도였지만, 제 SNS에 공유하면서 스스로 동기부여를 해주는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홀수 일차에는 서호 모습을 공유하고, 짝수 일차에는 동호 모습을 공유합니다. 인스타그램, X, Threads에 매일 공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루틴을 하게 된 이유는 제가 러닝을 하는 장소인 석촌호수의 시간, 계절을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인증샷을 남기다가 문득 매일 1초씩 석촌호수의 모습을 남기면 나중에 재미있는 콘텐츠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인증샷을 찍는 동호의 한 전망대와 수변무대에서 바라본 월드타워를 매일 1초씩 촬영했습니다. 그러다가 매일 한 발짝씩 오른쪽으로 움직이면서 찍는 것도 재밌겠다 싶어서 찍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인증샷과 영상을 찍다 보니 석촌호수에 대한 애정이 더 생겼습니다.



매일 특정 시간에 같은 장소를 방문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경험입니다. 아무리 같은 장소라도 항상 같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듯이 석촌호수도 매일 조금씩 변하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벌써 3번의 사계절을 함께 맞이하고 있는데, 아름답게 핀 벚꽃, 초록빛 녹음과 매미 울음소리, 노랗고, 빨갛게 물든 모습 등 정말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중에서 잊을 수 없는 2가지 순간을 꼽으라면, 첫 번째 쏟아지는 빗속에서 홀로 벤치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명상하는 순간이고, 두 번째는 하얗게 물들어버린 석촌호수를 뛰는 순간입니다.


돌비 사운드 영화관에서 듣는 그 어떤 사운드보다 뛰어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명상할 때의 기분은 정말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말에 그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색다른 경험입니다. 제가 우중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빗속에서 명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흰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아침의 석촌호수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누구도 밟지 않은 길에 소복이 쌓인 눈은 하얀색 도화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한 발짝 한 발짝씩 남기는 자국이 제 인생의 발자취를 남기는 기분이 들어서 너무 좋습니다. 뽀드득뽀드득하며 눈 밟는 소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석촌호수에는 저처럼 매일 러닝을 하거나 산책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을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다 보니 내적 친밀감이 많이 쌓입니다. 혹여 매일 보이던 분들이 보이지 않으면 괜히 걱정이 되곤 합니다. 안 보이던 분들이 다시 보이면 안심되고 너무 반갑습니다.



석촌호수는 제게 2가지 큰 깨달음을 줬습니다. 첫 번째는 각기 다른 생명체가 잘 어우러져야 다채롭고 아름답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멈추지만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석촌호수에는 다양한 동식물들이 있습니다. 같은 종이라도 크기도 다르고 색상도 다릅니다. 각자 나아가고 성장하는 방향도 달라서 나무가 가지를 뻗은 모습도 같은 것이 하나 없습니다. 그렇게 너무나 다른 종들이 모여있지만 서로 잘 어우러져서 살아갑니다. 저는 원래 정해진 규칙과 틀에 맞춰서 사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석촌호수를 보며, 제 생각 중 많은 부분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석촌호수에는 다들 앞으로 나아갑니다. 빠르게 뛰는 사람, 천천히 뛰는 사람,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 몸이 불편하셔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천천히 걷는 사람등 각자의 속도에 맞춰 앞으로 나아갑니다. 제가 석촌호수 한 바퀴를 뛰고 왔을 때, 아무리 천천히 걷는 사람도 같은 자리에서 마주치지 않습니다.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몇 발짝이라도 더 앞에 가 있습니다. 각자의 환경에 맞춰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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