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 : 이른바 "헬조선"을 벗어던지기 위한 여행
종교는 참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워낙 민감하기도 하거니와, 전문적인 지식 없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위험성은 너무나 크다. 종교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념이며, 그 사람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는 한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그 사회와 소속된 구성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특히, 나처럼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믿는 종교가 없으니 쉽게 이야기한다고 비판받을 여지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종교에 대한 깊고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자가 종교의 교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더더욱 무모하다. 여행기획자이니만큼 여행을 다니면서 접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최근, 종교로 인한 갈등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샤를리 엡도 사건은 종교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테러의 위험성을 드러낸 단적인 사례로 각인되었다. 이뿐인가. 얼마 전 IS의 프랑스 테러나 작년 일본인 인질 참수 역시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인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종교적 갈등을 뛰어넘어 이렇게 테러리즘으로 번지는 현 상황이 참으로 우려스럽다.
종교 갈등의 테러리즘 변질은 여행을 다닐 때에도 목격되곤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2014년 2월 이집트 시나이반도 성지순례를 떠난 한국인들 역시 폭탄 테러로 인해 3명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2013년 이집트에 방문하였을 때에도, 무바라크 정권 퇴진 시위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카이로 시내 곳곳이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던 모습은 일촉즉발의 장면이었다. 특히, 시나이반도는 이집트에서도 외곽지역으로 치안이 불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종교적 이유로 인한 폭탄테러의 위험이 도사리던 곳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테러는 용서받을 수 없다! (그건 서방국가가 가하는 폭력을 포함해야 하고!)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나와 같은 여행자에게 사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교회, 성당, 사원 등은 대개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역사와 건축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유럽 국가에 가면 여행지에서 꼭 봐야 할 곳으로 지역의 성당이나 교회를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성당과 교회는 그 지역의 가장 공을 들인 대표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은 한눈에 봐도 너무나 멋진 걸작품이다. 멀리서 피렌체를 전망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도 두오모 성당은 탁월하게 보일 만큼 압도적이다.
로마에서 본 판테온 신전도 기원전에 지어진 멋진 신전이라는 첫인상이 강렬하게 스쳤다. 이 판테온 신전은 단순히 역사적 건축물로 보존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전히 판테온 신전에서는 미사가 열리고 있다. 그저 고대의 유물로서가 아닌,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생각에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어느 나라와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여행지는 모든 건축과 예술이 집중되어 있는 성당과 모스크 등이 아닌가 싶다. 바르셀로나! 하면 가우디! 가우디 하면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떠올리지 않던가.
모로코 카사블랑카는 영화 카사블랑카로 유명하다. 하지만, 카사블랑카에 가면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은 바로 하산 2세 모스크이다. 아름다운 색상과 웅장한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의 예술적인 창틀은 굳이 이슬람을 믿지 않고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모습이다.
영화 미션임파서블:로그네이션에 잠깐 등장하는 곳이닷!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여행을 다니며 여행지에서 종교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내게는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던 곳이 있었다.
지난해, 케이블방송 "꽃보다 누나"에도 잠깐 소개되었던 터키의 아야소피아 성당이다. 아야소피아 성당은 터키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플로 불릴 때 비잔틴제국이 지배하고 있다가,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의 마호메트 2세가 정복하게 된 곳이다.
마호메트 2세는 아야소피아 성당에 와서, 가톨릭, 그리고 후세에 동방정교회로 바뀌어 장식이 된 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가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시 마호메트 2세는 아야소피아 성당에 이슬람의 상징인 코란을 함께 장식하고, 타 종교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를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물론, 예수의 얼굴을 지우는 등 종교적으로 우상숭배로 보이는 부분은 없애기도 하였다. 후세에 이 덧칠하고 지운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서 다시금 비잔틴제국 당시의 성당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게 되었다. 화합되지 못한 두 종교의 조화랄까, 아야소피아 성당은 두 종교가 공존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곳이다.
이렇게 종교의 화합으로 감동을 준 곳이 또 있다. 바로 이집트의 룩소르 지역이다. 룩소르는 피라미드 건립 이후 이집트의 건설 기술이 발전하면서 아름답고 웅장한 신전을 지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룩소르에는 여러 신전이 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특히 양머리 스핑크스라든지, 약탈해가서 유럽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오벨리스크의 원전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룩소르의 여러 신전 중 일부는 이집트의 고대 신전으로 사용되다가 후세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보통 신전은 3단계의 구성을 하고 있고, 신전 중앙으로 점차 들어갈수록 단계가 높아지게 되는데 가장 마지막의 단계에는 신전 곳곳에 교회로 쓰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신전을 부수지 않고, 그대로 교회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룩소르 신전 위에는 이슬람 시대 때 덧붙여 지은 건물이 눈에 띈다. 바로 이슬람 사원이다. 고대 신전이었다가, 교회였다가,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하나의 공간에 다른 종교가 함께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진정 종교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모든 이슬람이, 모든 가톨릭이, 또 모든 종교가 다 그렇게 함께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이 싸웠고, 또 그렇게 다른 종교를, 다른 국가를 탄압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파괴했던 곳은 여행을 다니며, 원래의 아름다움은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종교 간의 분쟁으로 인해 남은 상처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존중하고 함께한 곳은 여행을 다니며, 원래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외관의 모습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고 리영희 교수님의 "내가 아직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2"에는 이러한 글이 실려 있다.
"나는 6. 25전쟁이 일어난 바로 다음 달(1950년 7월)에 입대하여 1957년 7월까지 하루도 에누리 없는 만 7년간을 군인으로 복무했다. 전쟁 중 3년 반은 최전방 전투지에서 살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야 후방근무로 배치됐다.
그 포탄이 작렬하는 전투지에서는 대개 누구나가 신앙을 갖게 되는 법이다. 아니면, 적어도 종교적인 심정이 된다. 죽음과 함께 사는 순간의 연속이니까!
전투지에는 가끔 승려 신부 목사, 당시의 군대 용어로(지금도 그렇겠지만) 군종(軍宗)이라 했던 분들이 힘겹게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들이 오면 우리 장병들은 강원도 향로봉 1천 미터 고지의 혹한 속에 줄지어 서서, 덜덜 떨면서 축도를 들었다.
"하나님(또는 부처님) 이 전투에서 이 부대가 불구대천의 인민군을 남김없이 무찔러서 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전쟁터에서 상대방만 죽고 나는 살 수 있도록 빌어주니 고마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경건하게 고개 숙여 듣고 있는 나의 가슴에는 그때마다 가벼운 회의가 고개를 들었다.
나의 종교적 이해로는 신 부처님 천주님 예수님 알라 등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이며 보편적 사랑의 존재이다. 축도하는 그 분들도 그렇게 정의를 내린다. 그런데 전쟁은 인간들이 각기의 이해관계의 갈등을 물리적 최후수단으로 결단내는 살육행위이다. 625전쟁은 한 민족인 형제가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싸운 행위이잖은가. 사랑이란 티끌만치도 없다. 그것은 야차가 되어버린 인간(중생)들의 분별적(分別的) 행위에 불과하다.
나는 묵묵히 이 축도라는 저주의 말을 듣고 서 있으면서 생각했다 범애(汎愛)의 존재이며 절대적인 신(神)에게 국군용사가 있고 불구대천의 인민군이 따로 있을까? 어느 쪽 인간이 어느 쪽 인간을 죽이는 행위에 신은 축복을 내리는 것일까? 신도 편을 드는 제한된 존재일까?"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세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한다고 하지 않던가? 특정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 볼 때, 가장 아름다운 종교의 모습은 서로를 인정하고, 조화로운 모습을 보일 때라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 인도에서 개봉한 PK라는 영화가 있다. '세 얼간이'의 감독인 라지쿠마르 히라니와 주연인 아미르 칸이 다시 손을 잡고 만든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인 영화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외계인인 PK가 지구에 불시착하여 겪는 에피소드로, 특히 종교와 신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에 의아해하며 이를 비판한 내용이 담겨있다. 주인공인 PK는 편견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와 TV토론을 하면서 이러한 말을 던진다.
"어느 신을 믿어야 하죠? 신은 한 분 뿐이라고 하잖아요.
내 생각엔 아닌 것 같아요. 두 종류의 신이 있는 것 같다구요.
당신들을 만드신 신과 당신들이 만든 신이요. 난 당신들을 만드신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들이 만든 신은 당신들과 똑같아요. 쩨쩨하고, 거짓말쟁이에, 타락해서 거짓 약속이나 하곤 하죠.
부자들은 바로 만나주시지만, 가난뱅이들은 줄을 서서 만나 봬야 해요.
감사를 드리면 기분 좋아하시지만, 작은 일에도 사람들이 겁먹게 만드시죠.
모두를 만드신 신을 믿으세요"
여행을 가서도 조화로운 종교적 가치관을 보게 될 때, 그 종교적 가치관이 그곳을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곳에 가게 되면, 이렇게 함께 조화로운 모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모두를 만드신 신에게 기도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게 바로 종교의 참의미가 아닐까? 여행을 가서도 조화로운 종교적 가치관을 보게 될 때, 그 종교적 가치관이 그곳을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곳에 가게 되면, 이렇게 함께 조화로운 모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모두를 만드신 신에게 기도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게 바로 종교의 참의미가 아닐까?
※ 본 글은 제가 2015년에 작성한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종교의 조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할까"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한동안 글을 연재하지 못했네요. 해외 프로젝트 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보니 글을 쓸 시기를 놓쳐버렸습니다. 제게 축하할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 브런치 연재 글인 "여행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가 출판사 아미르하우스를 통해서 올해 3월 정도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 소식은 향후 다시 업데이트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