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 : 이른바 "헬조선"을 벗어던지기 위한 여행
여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은 여행을 보다 풍성하고, 즐겁게 만드는 존재들임에는 분명하다. 지난 연재 글 “고양이와 함께 춤을”이 바로 그러한 동물들의 이야기라면, 이번 이야기는 여행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동물과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들여보고 싶다.
흑흑! 이번 연재 글은 우리 이야기이구나!!
언젠가 한 번 소개하였던 곳! (정확히는 본 연재 글 “그곳에 원주민이 있었네” 글의 주 설명 지역) 바로 몬둘끼리는 캄보디아의 동북부에 위치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다. 몬둘끼리 주(Province)의 중심도시 센 모노룸 인근에는 크메르인이 아닌 원주민들이 크고 작은 마을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도시민보다 풍족한 경제적 여유를 누리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일부 전통가옥을 짓기도 하고, 행사가 있을 때에는 전통의복을 착용하면서 살고 있다. 무엇인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세련되어 보이진 않았지만, 원주민 마을은 참 목가적이고 평화로웠다.
아마도, 이러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는 마을에 자연스럽게 함께 거닐던 가축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몬둘끼리의 원주민 주종족인 “부농”의 마을을 들어가는 순간, 가장 눈에 띈 것은 바로 돼지들이었다. 우리가 아닌 가옥의 그늘에서 쉬고 있거나, 마을을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그 돼지들. 아기 돼지에게 다가가자, 곧바로 어미 돼지가 어디에선가 나타나서 아기 돼지 앞을 막아서는 모습이 천상 자녀를 생각하고 보호하려는 사람의 부모와 다를 바 없었다.
원주민 마을에는 돼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집 주위에는 버팔로와 개, 닭이 함께 살고 있었다. 아니, 집 주위뿐만 아니라, 전통 가옥에 들어가자 그 안에도 역시 개와 닭, 어린 돼지들이 함께 놀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풍족해 보이진 않았어도, 자신들이 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개와 돼지들에게 정성스레 밥을 챙겨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가적이라는 말의 뜻은 농촌처럼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서정적인 것이라고 사전적 정의가 되어 있다. 목가적인 풍경은 단지 농촌의 가옥이나 들판으로만 상상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을 감고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려보자. 내게 목가적이란 표현은 평온한 농촌지역에 새가 날아다니거나, 아이들과 강아지가 뛰어놀고, 소, 돼지를 키우고 있는 모습이 연상이 된다. 그만큼 동물들의 평온함이야 말로 목가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데 일등공신이라고 생각된다.
언제부터인가, 농촌에서도 공장식 동물 사육이 많아지고 있다. 닭들이 양계장에서 빼곡하게 들어차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여 계란만 낳게 하거나, 비좁은 우리 안에서 소나 돼지들이 밥만 먹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 목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목가적이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비좁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함께 병드는 모습이다. 구제역이 괜히 전염되겠는가. 밀집사육이 계속되는 한 목가적인 풍경도 기대하기 어렵고, 구제역과 같은 질병도 예방할 수 없다.
바르셀로나는 여행자의 도시이다. 4계절 온화한 기후와 가우디로 대표되는 매력 있는 건축물, 거기에다가 자라, 망고, 마시모두띠, 깜빠르로 대표되는 유럽 패션 쇼핑의 중심지인 람블라스 거리까지. 타파스, 빠에야로 대표되는 스페인 음식을 접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레스토랑과 보케리야 전통시장을 이야기 안 하면 섭섭하다. 그렇기에, 바르셀로나에 가면 전 세계의 다양한 여행자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행자들이 너무나 몰려드는 탓일까? 여행자들에 대한 현지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이야기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너무나 많은 여행자들이 몰려오는 탓에 쓰레기 문제도 심각해지고, 교통정체는 심해지고, 게다가 물가도 상승해버렸다. 여행자들의 도시는 지역의 삶을 부유하게도 만들지만,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고, 양극화로 몰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바르셀로나에서는 노숙자들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이 여행자들에 따른 물가상승 등으로 내몰린 것인지, 여행자가 많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로 몰려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행자로 인한 풍경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바르셀로나의 노숙자들은 대부분 개와 함께 한다. 적게는 한 마리, 많게는 두세 마리의 개들을 데리고 호텔 앞에, 역 주변에, 유명 관광지 앞에서 판자나 이불을 깔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개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었다. 실제로 많은 노숙자들은 개들을 어필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비교적 동물에 대해 호의적인 유럽인들이 개에 대해 동정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 몸도 건사하기 힘든데, 개를 데리고 다니다니!
게다가 저 개는 더 불쌍해 보이려는 수단일 뿐이잖아!”
처음 그렇게 생각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그동안은 그저 개를 통해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꼭 그러한 모습은 아니었다.
추운 겨울, 밖에서 자는 것이 녹록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도 많이 추울 듯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목도리를 개에게 걸어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기는 오히려 추위를 그대로 맞아도, 함께 자는 개에게는 목도리를 걸어주고, 팔베개를 하고 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단, 이 노숙자만이 아니라 많은 개를 데리고 있는 노숙자들은 자기는 먹을 것이 좀 부족하더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개에게 나눠주고, 비스킷 등을 사놓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 저 옆에 있는 개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닌 것 같았다. 이 힘들고 외로운 현실에서 가장 옆에서 의지하고 함께 하는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 따뜻하게 잘 수 있는 한 켠을 내어주고, 먹을 것도 먼저 챙겨주고 있었다. 반려. 말 그대로 반려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노숙자들과 함께 하는 동물들이었다.
베를린은, 아니 독일은 다른 유럽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면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을 갈 때마다 날씨가 흐리고 우중충했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 사람들이 비교적 무뚝뚝하고 어두워 보였다고나 할까? 아마 날씨 탓일 게다.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에도, 다른 독일 도시에 비해 더욱더 독일(?)스러웠다. 그나마 바이에른 로맨틱 가도의 아기자기한 소도시를 다녔을 때에는 전통 가옥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더 마음이 편안했다고나 할까? 베를린은 이상하게도 딱딱해 보였다. (지극히도 개인적인 주관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동물이 안 보여서 그랬던 것도 같다. 더 구체적으로는 유기동물이랄까. 여행을 다녀보면 사람 만나는 것도 여행의 묘미이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동물과 인사하고, 함께 노는 것이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이다. 특히, 터키나 모로코와 같이 고양이 천국이 나라에서는 골목골목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이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독일 전역, 그리고 이 베를린에는 왜 이리 유기동물이 안 보이는 것일까? 여행 일정 중 검색을 해보다가 유기동물 보호소인 “티어하임”을 찾게 되었다. (티어하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캣바이캣의 브런치 글 "독일 유기동물들의 단단한 울타리: 베를린 유기동물 보호소 티어하임"을 참조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 티어하임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서는 유기동물 보호소라기보다는 유기동물뿐 아니라, 집에서 사정으로 인해 동물을 키울 수 없을 때 이를 보호하고 맡길 수 있는 종합 반려동물 보호소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티어하임”의 뜻은 동물의 집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반려동물인 개와 고양이뿐 아니라, 새, 토끼, 조류 등이나 더 생소할 수 있는 오리, 닭, 도마뱀, 양, 돼지 등을 함께 보호하는 곳이다.
티어하임은 체계적으로 잘 조성된 하드웨어 시설과 열의를 가진 자원봉사자, 그리고 철학을 갖고 운영되는 동물 보호, 입양, 교육 프로그램이 성공적인 운영을 이끌고 있다. 개와 고양이를 분리하여 그들의 특성에 맞게 보호소를 개발하였으며, 개와 고양이 모두 실외와 실내 공간을 분리하여 각 개체들이 다양한 장소에서 활동하도록 고안되었다. 주기적으로 개들은 중앙에 위치한 산책 및 놀이공간으로 나와서 놀거나,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목줄을 하고 티어하임 전체를 산책하기도 한다. 고양이 보호소는 고양이의 습성에 맞춘 놀이기구와 안식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역시, 실외와 실내를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더욱 훌륭한 티어하임의 장점은 보호소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거나, 별도의 훈련이 필요한 동물을 위한 교육 훈련소가 따로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유기동물 보호라는 관점이 아닌, 진정으로 그들의 삶을 걱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티어하임의 한 켠에는 동물들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난 뒤, 묻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저마다의 주인들이 그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어, 다시 그들을 기릴 때 이 티어하임에 와서 만나볼 수 있다.
티어하임에 가서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면? 아마 많은 동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공통적인 생각이 들 것이다. 한 마디로 부럽다. 그들의 정책에, 그들의 시설에, 그들의 마음가짐에. 그리고 처절하게 반성하게 된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이만한 규모의 동물보호소를 개발할 수 있을까? 재원은? 장소는? 개발이 될 경우 주변 지역에서 반대는 없을까? 이렇게 잘 운영될 수 있는 비용이 마련되게 될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오가게 된다.
사람에게 인권이 있듯이, 동물에게는 동물권이 있다. 해외에서 애니멀 라이트(Animal Right)라고 부르는 이 권익은 보호받아야 할 동물의 권리를 의미한다. 사람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동물에 대한 권익이냐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떠한 사회라도 그 사회에서 가장 약자를 보호하고, 학대를 방지하며, 그들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그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를 보여주는 잣대라 할 것이다.
찰스 패터슨의 책 “동물 홀로코스트”의 에필로그 부분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다.
히틀러는 선언했다. “힘이 없는 자는 살 권리가 없다.” 미국은 이 신념이 뿌리내리는 데 더 없이 좋은 기름진 땅과도 같다. 미국에서는 매일같이 아주 어리고 무구한, 수백만 마리의 양, 송아지, 돼지, 닭, 소, 말과 다른 동물들이 도살장으로 수송돼 도살된 뒤, 만물의 영장의 식탁 위에 올라간다. 왜 그럴까? 동물들은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잡아먹는 사람들에 맞서 싸우지도, 방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물들을 위해서 그 싸움을 기꺼이 해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동물들에 대한 보호와 권익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개나 고양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고 힘이 없는 약자에 대한 정책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그 사회가 발전하기 위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못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억압하는 정책은 한 편으로는 가장 정책적으로 편한 방법이지만, 사회를 냉각시키고 그 사회를 불신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용어도 가장 힘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손쉬운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이 사회의 결과물이다.
동물들을 위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은 반드시 모든 사람이 채식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할 수도 없고, 동물권을 이야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물들이 죽기 전까지라도 최소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동물권을 지켜주기 위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이 존재하는 계급 인종차별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겼을 때에도 많은 백인들은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귀찮고 내 권리가 침해당하면서까지 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을 못 한다고, 그 말을 밖으로 낼 수 없는 환경이라고, 말을 하지 않는 개체가 생각까지 없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