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 : 이른바 "헬조선"을 벗어던지기 위한 여행
지난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금강산에서는 역사적인 이산가족 행사가 개최되었다. 2000년 8월 처음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후 이번이 20번째 행사라고 한다.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남북관계가 너무 경직되어서 다시는 금강산이 열릴 것 같지 않았는데, 다시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열리게 된다니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필자의 경우에는 이산가족 행사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처음 회사에 들어가서 1년 정도 지난 후였다.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행사가 열릴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제4차, 제5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준비하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서류를 꾸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컴퓨터 폴더 한 켠에는 이때의 추억이 남아 있다.
물론, 당시에는 추억이라기보다는 일로 다가오다 보니 스트레스 압박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이산가족 행사는 이산가족들에게는, 또 우리 역사에 있어서는 감격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이산가족들이 워낙 고령이기에, 남의 일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언론에서도 예전만큼 이슈가 되지도 않고, 사람들도 이제 무덤덤해졌다. 잊혀지고 있는 남과 북이다.
잊혀지고 있으나,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조금 생뚱맞지만, 오늘 이야기는 남과 북, 그리고 여행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앗! 잠깐!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을 지칭할 때에는 남한이 아닌 남측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지칭할 때에는 북한이 아닌 북측이라는 표현을 하고자 한다. 남측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북한이라는 용어는 북측 입장에서 볼 때, 정치적으로 민감한 용어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반대로 북측에서 남측을 남조선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교류에 있어서 서로를 이해․인정하자는 의미 및 자집단 중심적 언어 사용을 탈피하고자 함으로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으로도 좌빨이라고 하면 아니 되오!
남과 북이 지금은 일반인 왕래가 거의 없었으나, 15년 전에는 그래도 관광을 통해서 제한적으로나마 북측을 가볼 수 있었다.
그 전에는? 특히, 1998년 전에는 북측을 일반인은 거의 가볼 수 없었다. 남북의 창이라는 TV 프로그램으로 볼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금강산 관광이 뱃길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육로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다. 이후 잠시 개성지역도 시범관광이 진행된 적도 있고, 또 평양도 아리랑축전을 즈음하여 잠시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는 첫 직장이 금강산 관광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어, 적잖이 금강산을 여행할 수 있었다. 또 일반인들이 많이 가보진 않았지만 개성 역시 방문할 수 있었다. 젊은 저에게는 산을 오른다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니지도 않았기에, 사실 이산가족과 같은 어떤 의미를 갖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쩌면 이 글을 보는 많은 사람들도 북측에 대한 매력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쩌면 그저 산에 불과한(?) 모습보다는 우리와 다른 색다르고 재밌는 몇 가지 사진들을 우선 소개할까 한다.
개성에 갔을 때 개성의 남북출입국관리사무소를 나오고 났을 때이다. 북측의 판매원이 고운 한복을 입고 지팡이 등을 파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필자에게 개성은 이렇게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개성 여행 중 노점에서 파는 음료수의 모습. 과일단물, 코코아 탄산단물 등이 보이시는지? 환타, 사이다, 콜라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저는 개성관광이 꼭 이루어졌으면 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사진 때문이다. 금강산과는 달리 개성 시내에 남북이 함께 있는 모습. 사진의 앞쪽에는 남측 관광객이, 사진의 뒤쪽에는 북측의 주민들이 함께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필자가 어렸을 때 배웠던 "북측은 다 뿔달렸다"라는 것도 잘못되었다는 것도, 그들도 그저 우리와 같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말 그대로, 리영희 교수님의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랄까?
물론, 원래 옥류관은 평양에 있지만, 금강산에도 옥류관이 생겼었다. 맛이 약간은 다르지만, 그래도 그 냉면 맛은 지금도 생각나기에 충분했다. 맛있어 보이지 않는지?
제가 북측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해금강에 있는 저 건물이다. 소나무를 자르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건물을 지을 때 구멍을 뚫은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이기에.. 그리고 늘 또 함께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단편적인 사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점점 그 소중함이 멀어지는 것 같아 아쉽다. 또 금강산을 다시 갈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금강산, 그리고 남북이 반세기 만에 겨우 이어져왔는데 이제는 언제 갈지 모르는 곳이 되어버렸다.
필자가 북측을 여행했을 때가 남북 모두 더 평화로웠던 것 같은데, 그걸 우리 정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통일은 대박이라는데, 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는 현실이다.
여행을 이야기하며 생뚱맞지만 남북관광은 자연스럽게 통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언제나 통일을 이야기할 때는 무조건 통일은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은 어떠한 형식으로도 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죽는 그 날까지 한민족 통일을 위해 노력하셨던 장준하 선생님은 통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_「민족주의자의 길」『씨알의 소리』, 1972년 9월호
이는 장준하 선생님의 조국분단 앞의 선언이다. 장준하 선생님도 모든 통일은 좋다고 하셨지만, 분명 이는 올바른 통일이지, 한쪽 사상을 억압하고 체제를 전복하면서 통일을 하자는 것은 아닐 것다.
이렇게, 통일은 하나의 조건은 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때, 흡수통일이든 적화통일이든 절대 실현 가능성 없는 것은 잊어버릴 때, 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조건은 체제 및 사상 포기, 토지 등의 부동산 재산의 상환 등이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여 흡수통일을 배제하고, 두 정부가 서로의 제도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혼란을 최소화하며 통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민화협 상임의장이고, 고려대 명예교수이기도 한 강만길 교수님의 이야기한 것을 듣고, 전 그제야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이다."
라 말씀하신 그 말이 너무나 와 닿았다. 별 것 아닌 이 말은 계속 곱씹어 볼수록 진가가 있는 말이다. 왜냐고? 통일되지 않는 이 휴전(休戰) 상황에서 우리는 평화로울 수가 없을 테니깐.
통일은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기 위함이다. 통일은 더 이상 국방비와 젊은 남성들의 희생을 지속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통일은 일제 해방 이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통일은 이산가족 및 비전향 장기수 그리고 북측에 있는 국군포로 등의 행복과 자유를 위함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통일은 평화롭게 살기 위함이다.
너무 심각했나 보다.
아무튼, 이번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이 앞으로도 자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나아가 다시 금강산과 개성을 갈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남북이 서로 왕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두 지역이 평화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 첫째가 물적 교류로, 그리고 그 둘째가 인적 교류가 이루어질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앞에서 본 사진들처럼..
남과 북은 서로 참 다른 것 같다.
그렇게 60년 넘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려왔으니, 그 거리를 따지면 단순히 한쪽의 내달린 거리보다 2배가 되는 거리만큼 서로는 멀어져왔다. 그런데, 만약 서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더더욱 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다시금 그 모습을 보길 원하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펼쳐보며 다시금 여행을 가보길 소망한다.
※ 본 글은 작년 필자가 네이버 포스트에 쓴 글을 브런치에 맞게 각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