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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체(생선회와 해산물을 레몬즙이나 식초에 절인 페루 요리)와 빵 두 조각으로 저녁을 간단히 먹었다. 생선의 종류는 알 길이 없었으나 생선회의 식감과 강한 신맛이 조화를 이루어 이번 여행에서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만족스러웠다. 침대에 앉아 아버지의 노트를 펼쳤다. 내일의 목적지인 우슈아이아에 대한 부분을 찾았다.
‘우슈아이아는 남미 대륙의 끝으로 유명하지만 대륙의 끝이 아니다. 마젤란 해협 건너 티에라 델 푸에고 섬의 끝이다. 대륙의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은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이다. 우슈아이아의 남쪽으로는 칠레의 해군기지 푸에르토 윌리암스가 있는 나바리노 섬을 비롯하여 많은 섬이 있다. 여기를 남미 대륙의 땅끝(Fin del Mundo)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일종의 상술이고 사기다.’
노트에 쓰인 부분의 제일 뒤를 펼쳤다.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수명이 다할 수 없다. 정신을 먼저 잃게 되면 존재 이유가 없다. 존재 이유가 없는 육체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인권을 주장해서도 안되고 부여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육체가 먼저 수명이 다해야 한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인위적으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법적으로 허용되는 안락사만이 답이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마지막 인권이다.’
암이 드디어 뇌로 전이된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아버지는 조금도 동요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항암치료도 받지 않겠다며 진통제 처방만을 의사에게 부탁했다. 더 이상 정리할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며 본인의 죽음을 빨리 맞기를 원했다. 결국 30년 이상 애지중지하던 자동차를 타고 집을 나가 이틀 뒤 한계령 계곡에서 추락한 자동차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겨울철 눈길 교통사고로 보였지만 사고가 아니란 것을 누나와 나는 직감으로 느꼈다.
티에라 델 푸에고 섬은 제법 크다. 섬 중앙에 남북으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선이 일직선으로 그어져 있어 내일 다시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리고 리오 그란데를 거쳐 우슈아이아까지 종일 운전하면 된다. 리오 그란데에서 우슈아이아까지의 그 길은 천천히 음미하라고 아버지는 내게 강조했다. 내일이 기대된다. 나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를 알 수 있기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