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 라켓 들고 유랑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 넷이 가장 완벽하다고 한다. 자동차 여행이라도 대부분의 승용차가 5인승이지만 5명이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한다면 뒷자리 앉은 세 명은 매우 힘들다. 그리고 넷이면 어디서나 쉽게 택시로 이동할 수 있다. 여행을 혼자 다니면 외롭고(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둘이 다니면 좀 허전하거나 심심하고, 셋이 다니면 하나가 틀림없이 소외된단다. 그래서 넷이 좋단다. 사실 모든 음식점의 테이블은 대부분 4인용이다. 함께 마주 보고 먹으면서 쉬지 않고 수다 떨기 제일 좋은 수가 넷이다.
한국에서 골프는 넷이 쳐야 한다. 요새 넷이 안치고 셋이 치면 돈을 더 내야 하는 골프장들이 많아졌다. 한국 골프장들이 배짱이다. 그래서 더욱 이즈음 한국에서 골프 치기가 점점 싫어진다.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넷을 만들어 놓으면 광클해야 하는 한국 골프장에서는 부킹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원하는 날짜 시간에 골프 부킹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대단한 능력이다. 그래서 일단 골프장 부킹을 먼저 하고, 동반 라운딩 할 멤버들을 모으는 경우가 있다. 사람을 모으는 것보다 골프장 부킹이 더 어려우니... 골프 함께 칠 친구가 없다는 것도 문제고, 함께 골프 치겠냐고 오는 연락이 없는 것은 더 문제다.
하루를 투자해야 하는 골프와 달리 15분 정도를 함께 하는 배드민턴 복식경기도 꼭 넷을 만들어야 한다. 배드민턴 클럽에서 몸 풀고 있거나, 난타치고 있거나, 쉬고 있는 회원들이 다 대상이다. 심지어 게스트도. 빨리 넷을 만들어야 한다. 너무 재미있어 문제인 복식게임을 오늘 한 게임이라도 더 할 수 있으니까… 대상이 많으면 선택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와 비슷하거나 아주 조금 더 잘 치는 사람과 게임을 하고 싶다. 팽팽하고 쨍쨍한 게임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네 명을 모으려는 눈치가 체육관 허공을 끊임없이 날아다니고 있다.
배드민턴 라켓과 운동화를 들고 서귀포에 왔다. 어디서 배드민턴을 칠 수 있을까? 일단 서귀포 배드민턴 협회의 홈페이지를 찾았다. 협회에 등록된 클럽들의 목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서귀포시는 제주도를 동서로 나눈 아래 반쪽이라 무척 길다. 동홍동에서 동쪽 끝 성산이나 서쪽 끝 대정은 한 시간을 운전하고 가야 한다. 배드민턴을 치러 가기는 멀다는 얘기다. 제주도민들은 한 시간 이상 운전을 안 한다. 서울 사람들은 보통인 한 시간 거리를 무척 멀게 느낀다. 우선 클럽의 위치를 확인하고, 회원수를 살펴본다. 회원수가 50명이 넘으면 웬만한 체육관은 코트가 붐벼서 게스트의 출현을 반기지 않는다. 두 군데 클럽에서는 총무님한테 퇴짜 맞았다.
서귀포 천지클럽을 찾았다. 서귀포고등학교 천지학생체육관에서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다. 대부분의 클럽들이 이 시간에 운동한다. 가끔 새벽에 운동하는 클럽도 있기는 하다. 아들과 함께 오후 7:40경에 체육관에 도착했다. 체육관 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이미 회원들이 난타를 치고 있었다. 게스트의 자세(이온음료수 1.5리터 4병과 종이컵 들고)를 갖춰 연신 인사하며 체육관을 가로질러 본부석으로 간다. 회원들은 한눈에 게스트임을 알아본다.
여러 사람이 반갑게 대해준다. 매일 저녁 이 시간에 사람들과 어울려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은 여유 있는 사람들이다. 운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운동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운동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연유로 못하는 사람도 많다. 배드민턴은 넷이 쳐야 하기 때문에 사회성이 좋아야 한다. 제일 멀리 있는 빈 코트에서 아들과 난타를 한동안 쳤다. 사람들은 나와 아들의 난타 치는 모습을 보고 잽싸게 판단한다. 배드민턴을 얼마나 친 사람이고 어느 정도 실력인지를 가늠한다. 아들이 어릴 때 문방구에서 파는 배드민턴 채로 집 앞에서 친 적이 있을 테지만 제대로 코트에 서보기는 처음이다. 아들은 라켓 잡는 법도 모른다. 초보도 이런 초보 없다 싶다.
아들이 힘들다고 체육관을 나갔다. 아마 담배 피우러 간 것 같다. 한 회원이 내게 다가와 한 게임 하겠냐고 묻는다. 그렇잖아도 아들과 난타 치는 것이 재미없어 기다리는 중이었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아저씨(?)들과 어울려 무려 세 게임이나 했다. 실력이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조금 날까? 체육관 마룻바닥이 맨질맨질하다. 그려진 녹색선도 가운데는 거의 벗겨졌다. 총 6면의 코트가 있는데 화요일 저녁에 나온 회원은 20명 남짓이다. 대부분 아저씨고 어린 여학생들이 네댓 명 정도다. 아주머니들은 한 분도 안 계신다. 그러니 나 같은 게스트도 환영이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은 나이 들수록 점점 어렵다. 그래서 옛 친구들만 만나기 쉽다. 배드민턴을 함께 치기 위해 사귈 필요는 없다. 이름도 나이도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도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상관 없다. 오직 구력과 실력만이 궁금하다. 나랑 함께 운동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인생의 귀한 시간 재미있게 땀내며 운동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은 천지클럽에서 여유 있고 친절한 호모 사피엔스들과 충분히 땀내며 즐턴 했다. 오늘은 샤워하고 쉽게 잠들 것 같다.
천지클럽 체육관은 탈의실도 있고 샤워실도 있다. 샤워준비까지 해왔다면 더 좋았을 걸 했다. 모레는 10분 거리의 효돈생활체육관을 사용하는 모아클럽에서, 글피는 20분 거리의 남원생활체육관을 사용하는 혜성클럽에 게스트로 초대가 아닌 승낙(클럽 총무님들과 메시지 교환)을 받았다.
배드민턴 라켓 들고 서귀포 일대를 유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