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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Mar 31. 2024

누나 & 여동생

외손녀 도은이는 만 22개월이다. 할아버지란 발음이 어려워 '하라비'라고 한다. 이제 두 단어를 붙여서 간신히 말하는 수준이다. '원초적 본능'만이 아직도 작용하는 나이다.  본능만 있고 전혀 교육되지 않은 상태, 그러나 자신의 의사표현은 제법 할 수 있다. 요구하는 방법도 안다.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울어재낀다. 심지어 콧물과 눈물을 섞어 너무 서럽게 운다. 안 들어줄 방도가 없다.


할아버지를 보면 너무나 반갑게 달려온다. 내 다리춤을 붙잡고 감싸 안으며 그리고는 두 팔을 들어 자신을 들어 올려달라고 한다. 번쩍 들어 올려 내 가슴팍에 안으면, 내게 기대어 나를 안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것 같다. 내가 도은이에게 이렇게 점수를 딴 것은 '베베핀'이란 어린이 동영상을 유튜브로 보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을 볼 때 5살 오빠가 다가와 기웃거리면 오빠를 밀어낸다. 자기가 보는 영상은 자기만 봐야 한다. 오빠가 안 밀리고 계속 있으면 아주 짜증을 심하게 부린다. 신기할 노릇이다.


오빠가 무엇인가를 먹고 있으면 도은이는 만사 제치고 달려든다. 그리고 무조건 뺏고 본다. 먹을 것에 대한 욕구가 장난 아니게 심하다. 설마 소아 당뇨에 걸리거나 뚱뚱해지지는 않겠지. 음악이 들리면 바로 춤을 춘다. 나름 엉덩이를 돌리고 어깨를 들썩 거리며 팔을 흔드는데 리듬에 맞는 것이 신기하다. 두 돌도 안된 도은이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있으면 너무 사랑스러워 할아버지도 어쩔 줄 모른다. 지금이 만 세 살까지 보여준다는 재롱의 절정기라는 생각이 든다.


다섯 살 도민이 오빠는 여동생 도은이가 불편하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이제는 동생을 때리지 않지만 도은이가 조리원에서 집에 오고 엄마가 도은이만 챙기는 것 같아, 그때는 심술도 부리고 말도 안 되는 행동도 많이 했다. 어느 정도 여동생이 말을 알아듣자 책도 읽어주며 같이 놀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자신의 장난감을 빼앗거나 기껏 쌓아 올린 것을 동생이 무너뜨리면 울어 젖힌다. 엄마 아빠가 도은이를 잘 돌봐야 한다고 항상 얘기하기에 거의 세뇌당한 수준이다. 그러나 가끔 여동생 때문에 엄청난 짜증을 부린다.


내가 보기에 여동생은 평생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가까운 동료와 한 잔 하는 중이었다. 그도 3년 후엔 정식 어르신이다.


아내가 여동생 같단다. 여동생과 한 침대에서 자는 기분이란다. 그런데 그 여동생이 참 얄밉단다. 아주 얄미운 여동생과 사는 것 같단다. 함께 살면서 드는 모든 비용은 오빠인 내가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단다. 이제 은퇴도 몇 년 안 남았는데, 은퇴 후에도 여동생이 계속 얄밉게 굴면 어떡하지 한다.


1980년대 베이비부머가 한창 결혼할 당시는 가부장적 사회였다. 결혼할 때 신부가 신랑보다 연상은 드물었다. 대부분 신부가 두 살 내지 서너 살 아래인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5년 내지 7년이나 긴데도 말이다. 긴 것이 자연 현상인지 사회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랑이 신부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당연시한 것은 가부장적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통 외벌이였다. 여자가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생활비를 남자가 벌고 여자는 집에서 애 키우고 살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돈을 버는 사람이 목소리가 크고 서열이 높은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이제는 사회가 많이 변했다. 임금도 많이 올랐지만 주택값을 비롯한 생활비가 훨씬 많이 올랐다. 외벌이로 생존하기 힘들어졌다. 그러자 직업 없는 여자가 신부 되기 어렵게 되었다. 집에서 애 키우고 살림만 하겠다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남자들이 다 없어졌다. 그리고 신부가 연상인 경우가 너무 흔해 이제는 전혀 신기하지 않다. 여동생과 사느니 누나와 살기를 작정한 남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난 누나에 대한 환상이 있다. 누나는 다 착하고 남동생을 잘 챙겨줄 거라는 환상이다. 사춘기 시절 계모 밑에서 생활할 때 누나가 있었으면 하고는 했다. 남들처럼 누나가 있었으면 내가 덜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나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누나가 없었기에 생긴 환상인지도 모른다. 모든 누나가 착할 순 없다. 그러나 동화 속에는 남동생을 챙기는 착한 누나들만이 나온다. 동생을 괴롭히는 나쁜 누나는 이야기에 나오지 않는다. 이즈음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오빠라고 부른다. 오빠는 착해야 하고 여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는 가정이 전제된 것 아닌가 싶다.


착한 누나, 착한 오빠는 대표적인 '일반화 오류'다.


남동생을 업고 있는 남루한 어린 소녀의 사진을 보거나 눈앞에서 본 적 있나요? 전 예전에 인도여행하며 지겹도록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나요? 업혀있는 동생보다 누나 노릇을 하고 있는 소녀에게 눈길이 가고 애틋한 마음이 들지 않나요? 그래서 남동생을 안거나 업고 구걸하는 것이 우리 눈에 익숙한 것이지요.


어르신이 된 이 나이에도 착한 누나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은 의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착한 오빠에 대한 환상도 마찬가지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본능인 것 같다. 누나,  오빠, 부모 같은 비빌 언덕을 갖고 싶은 것이다.( https://brunch.co.kr/@jkyoon/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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