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거니 Jun 29. 2024

키르기스스탄 10

Seven Bulls

알틴 아라샨에서 딱 하루 자고 다시 Duet hostel로 돌아왔다. 스위스 처녀 한나도 말 타고 알틴 아라샨에 올라 유르트에서 하루 자고 말 타고 돌아왔고, 미국 중학교 선생 Angela도 Duet hostel로 오후 늦게 걸어왔다. 호스텔의 좋은 점은 주방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난 라면 한 봉지조차 갖고 오지 않았으니 주방이 소용없다. 혹시 몰라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은 초고추장 한통인데 아직 개봉조차 하지 않았다. 호스텔의 장점은 전 세계 여행객들이 모이는 곳이라 저녁 시간에 여행담을 나누며 한잔 하는 그룹이 제법 많다. 그러나 보통 이삼십 대 들이라 어르신인 내가 끼기는 그렇다. 설레발을 떨며 와인과 맥주를 사서 돌리면 모를까?


다시 Duet hostel로 와서 자던 방을 요구했는데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서 다른 방을 주려고 한다. 맥주 마시며 기다릴 테니 자던 방을 달라고 했다. 이틀을 자면서 익숙해진 방이 좋다. 방을 옮기면 모든 것(양압기 설치 위치, 변기와 샤워기, 짐을 놓는 위치 등등)을 모두 새로 세팅해야 한다. 그렇게 익숙한 것을 찾으면서 왜 집을 놔두고 방랑을 떠날까 싶다.


방문 열쇠가 고장 났다. 주인이 펜치 들고 힘주어 빼려다가 열쇠가 부러지면서 박혀버렸다. 열쇠뭉치를 아예 교환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행인 것은 열린 상태라는 것이다. 잠긴 상태였다면 거의 문을 부숴야 했을 것이다. 안에서는 잠글 수 있다. 그러니 밤에 잠그고 잘 수는 있는데 낮에는 문이 항상 열린 상태다. 주인이 도난은 절대 없다며 자기가 책임질 테니 문 열고 다니란다. 돈과 핸드폰은 항상 들고 다니니 문제가 안되는데, 양압기와 맥북이 그나마 귀중품이다.


서귀포 아들 집에 세워놓는 19년 된 현대 투싼이 있다. 서귀포 동굴(?)에 갈 때마다 잘 사용하고 있는데, 타이어 공기압도 체크할 겸 에어컨 가스를 보충하려고 블루핸즈에 갔다. 정비 마치고 나오는데 브레이크가 이상하다. 아까와 다르다. 다시 뒤로 움직여 정비소 마당에 간신히 세우고 보니, 운전석 브레이크 말단 호스가 터졌다. 브레이크 유압라인은 절대 터지지 않는 구리관을 사용하지만, 앞바퀴는 조향 때문에 좌우로 움직이니 말단은 보호철선으로 감은 고무호스를 사용한다. 19년 동안 28만 km를 달렸으니 고무호스가 터지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다행인 것은 정비소에서 터져준 것이다. 난 참 운이 좋다. 한라산 성판악 같은 곳에서 터지면 사고가 날 확률이 50% 이상이라고 본다. 사고가 안나도 꼼짝없이 견인해야 한다.


왜 갑자기 내 방 열쇠뭉치가 고장 났을까? 왜 갑자기 등산화 밑창이 떨어졌을까? 왜 갑자기 투싼의 브레이크 호스가 터졌을까? 왜는 무슨! 오래 사용하다 보면 모든 것이 수명이 다한다. 인간의 육체와 두뇌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갑자기 고장 난다. 예상할 수가 없다.


'왜'라는 이유가 없다.


여유 있는 아침을 즐기다 정오가 돼서야 채비를 하고 호스텔을 나섰다. 30여 km 떨어진 제티 오구즈의 일곱 마리 황소를 보겠다고... 얀덱스 택시로 900 솜이다. 일곱 마리 황소 같다는 붉은 황토색 큰 바위다. 유튜브로 많이 봤고 구글 맵 사진으로도 많이 봤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얼마나 큰 지도 안다. 일곱 마리 황소 바위 건너편에 전망대 같은 곳이 있다. 아예 택시로 전망대까지 갔다. 볼만은 하다. 그러나 그렇게 새롭거나 경이롭지는 않다. 이미 동영상으로 많이 봐서...


전망대에서 라테를 한잔 시키고 마시는데 싱가포르 커플들을 만났다. 알틴 아라샨 하산길에 합승했던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그리고 보니 오토바이를 타고 오르던 커플과 함께다. 오토바이를 싱가포르에서부터 타고 여기까지 온 거란다. 어느 어느 나라를 거쳤냐고 묻고는 싶은데 서로들 재미있게 얘기하는데 불청객으로 끼는 것 같아 인사만 했다. 아침식사를 충분히 잘 먹어서인지 오후 한 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다. 이상하다. 밥숟갈 놓을 때가 다가오는가?


1984년 여름이었다. 만성 B형 간염이 활동성으로 변하여 Absolute Bed Rest 처방을 받아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때 장길산이란 10권짜리 소설을 읽었다.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소설 속에서 '밥숟갈 놨다'는 말은 죽었다와 같은 말이라는 것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점심 먹을 장소를 두리번거리는데 차가 한대 서더니 한국인 부부가 내린다. 알틴 아라샨 호텔에서 만난 부부다. 나와 같은 날 잔 방이 예약이 되어 내가 자고 나온 방으로 옮겨 하루 더 자고 내려왔으니 오늘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벌써 새로운 관광을 또 시작한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를 징하게 사용하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는 포항에서 왔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나더러 그 방에서 어떻게 잤냐고 한다. 먼저 잔 방보다 너무 후져서 주인한테 방 바꿔달라고 했단다.


난 괜찮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키르기스스탄 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