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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l 06. 2024

키르기스스탄 15

나린을 떠나며


혼자 중얼거린다.

혹시 치매의 전조증상 아닐까?


혼자 방랑하면서 별로 말할 기회가 없다. 어쩌다 한국여행객을 만나면 반갑다. 말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대화라고 해봐야 서로의 여행일정과 방문했던 장소에 대한 후기를 교환하는 정도다. 거의 묵언수행 중이다. 이즈음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무엇을 결정하거나 지금 눈앞의 상황을 묘사할 때 혼잣말을 한다.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노인이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나린에서 3일을 잤다. 나린 시내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여행객도 시내에서 마주치지 않는다. 나린에 도착한 날 Nomad Coffee에서 메뉴판의 라면을 주문했다. 그리고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린에서 머무는 3일 동안 저녁을 매일 라면으로 해결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마지막 저녁에는 궁금해서 라면이 어디 것이냐고 물었다. 서빙하는 아가씨가 키르기스스탄 것이라고 한다. 그럴 리 없다며 라면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역시 오뚜기 진라면이었다. 라면이 200 솜이니 우리 돈으로 3,200원인 셈이다.


숙소를 나서 버스터미널까지 500m를 걸어가며 보니 등산화 테두리가 상당히 벌어진 것이 보인다. 비슈케크 오쉬바자르에서 밑창이 떨어지지 않게 꿰매었지만 다른 부분도 수명이 다했다. 비슈케크 공항에서 한국 갈 짐 부치고 등산화를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등산화 버리면 신발은 하얀 슬리퍼뿐인데 한국 입국을 슬리퍼 신고 하겠네 했다.


버스터미널의 아침은 분주하다. 사전답사를 했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표를 샀다. 400 솜 영수증에 두 개의 숫자를 써준다. 세 자리 숫자는 미니버스의 번호판 넘버이고, 10이란 숫자는 내가 열 번째 승객이란 얘기다. 짐칸에 큰 배낭을 싣고 차에 오르니 이미 9명의 승객이 타고 있다.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현지인이다. 뻘쭘해서 씩 웃으며 '하이' 하고, 빈 좌석 중에 어느 자리에 앉을까 둘러봤다. 시야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찾는 중이다. 경치구경을 해야 한다. 남은 자리 중에 시야가 제일 좋은 자리는 운전석 바로 뒷줄에 붙어 있는 3자리 중에 가운데 자리다. 창가 쪽 자리는 아줌마가 이미 앉아 있고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타고 내리는 문 쪽의 자리는 비어 있다.


비어있는 내 오른쪽 자리에 누가 앉을까 궁금하다. 엉덩이 큰 아줌마나 아저씨가 앉으면 최악이다. 시야 때문에 가운데 앉았는데 양쪽 엉덩이 사이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될 수 있다. 제법 잘 차려입은 엄마와 딸이 거의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 비슈케크에 결혼식 같은 행사에 참석하러 가거나, 맞선이라도 보러 가나 싶은 행색이다. 엄마가 뒤로 가고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딸이 내 옆에 앉았다. 다행이다. 최악을 피한 정도가 아니다. 긴치마, 긴 머리, 미카엘 코스(?) 백, 그리고 손톱을 길게 한껏 멋(네일 아트라고 하나?)을 부린 아가씨다. 내 오른쪽 엉덩이에 제법 여유가 있다.


8시 정각에 미니 버스가 출발했다. 많이 기다리지도 않았고, 시야가 좋은 자리도 확보했고, 아가씨가 옆에 앉았으니 좋은 하루의 시작이다. 경치가 끝내주는 도로를 벤츠의 어르신(오래된) 스프린터가 달린다. 시속 100km를 넘나 든다. 그런데 옆에 앉은 아가씨가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다. 고개를 왼쪽으로는 1도 돌리지 않는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기대지도 않는다. 차가 커브를 돌아 몸이 내쪽으로 기울 것 같으면 앞의 의자를 오른손으로 꼭 잡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다. 내가 고개를 돌려 말이라도 걸까 봐 엄청 경계하는 눈치다. 내가 인사라도 하면 화들짝 놀랄 기세다. 수줍어서 그런가? 나 같은 외국 여행객을 이렇게 가까이 접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내가 노인이라 그런가? 만약 젊은 외국 여행객 옆에 앉아도 이럴까?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다.


2시간을 달려 운전기사의 식사와 화장실을 위해 20분 쉬고 또 두 시간을 달려 비슈케크에 도착했다. 마지막 한 시간은 비슈케크 외곽의 트래픽과 기온 상승으로 인하여 힘들었지만, 운전기사 어깨너머로 키르기스스탄의 숨 막히는 경치 구경은 잘했다. 결국 그녀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떠나갔다.




비슈케크에서 36시간을 머무르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자정을 넘겨서다. 동남아에서 귀국하는 비행기 편과 거의 유사한 상황이다. 이런 경우 갈등이 생기는데 하루치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정오 전에 체크아웃하고 10시간 이상을 밖에서 보내다가 공항으로 갈 수도 있고, 아예 하루 숙박비를 더 지불하고 숙소에 있다가 저녁 먹고 짐 싸고 공항으로 갈 수도 있다. 비슈케크에서는 후자를 택했다. 필리핀, 태국, 베트남 같은 경우는 수면실도 있는 한국식 찜질방 사우나도 있어 쉬면서 시간 보내기가 수월하다. 마지막 마사지도 즐기면서...


비슈케크 서부버스터미널 옆의 Apple hostel을 예약했다. 전용욕실이 있는 방이 하루에 3,000 솜. 호스텔 마당의 그늘진 평상에 거의 자빠져 있는 서양 여행객들이 많다. 트레킹 투어 프로그램 예약도 해주고, 근교 당일 투어를 모집해서 보내주기도 하는 일에 제법 열심인 호스텔이다. 그리고 버스터미널 바로 옆이라 비슈케크 방랑을 여기서 시작했으면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방랑에 좋고 나쁘고 가 있을까?


저녁 8시경에 슬리퍼 끌고 터미널에 나갔다. 키르기스스탄 전역으로 가는 버스, 미니버스, 합승택시가 여기서 출발한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가는 야간버스들이 승객들을 태우기 시작한다. 그 시각에 7시간 걸리는 카라콜로 가는 버스와 미니버스들도 승객 모객에 열심이다. 13시간 내지 15시간 걸린다는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 오쉬로 가는 미니버스와 택시들이 많다. 여기저기 "오쉬 오쉬"하는 소리가 들린다. 24시간 열고 있는 식당과 가게들도 아직 한창이고, 터미널 건물 안에서 미용실도 아직 영업 중이다.


머리 자른 지 한 달 넘었는데 여기서 함 잘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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