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새벽 3시에 깼다.
악몽은 아니었지만 꿈속에서 뭔가 안달하다가 깼다. 아침 10시 비행기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간다. 어젯밤 10시에 침대에 누웠으니 충분히는 아니지만 잠이 부족할 정도는 아니다. 5시에 맞춰놓은 알람부터 껐다. 아무리 게으름 피운다 해도 10시 비행기를 놓칠 일은 없을 것 같다. 우리 동네 지하철 첫차가 5:46 임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했다. 이 시간을 맞춰 나가면 될 것이다.
지하철 첫차를 타본 적 있던가?
양압기와 맥북을 넣은 백팩과 일주일 방랑을 위한 작은 캐리어(7kg) 하나를 끌었다. 플랫폼에 들어오는 첫차에 예상과 달리 사람이 많다. 노약자석도 자리가 없다. 출근길 혼잡정도는 아니라 다행이다. 놀라운 것은 승객의 90%가 수컷이다. 젊은 사람도 간간이 보이지만 대부분은 오륙십 대의 수컷들이다. 첫차를 타고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항공용 캐리어를 끌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약간의 미안함이 느껴지는 묘한 감정이다. 캐리어에 훈장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 수화물 스티커가 신경 쓰인다. 변명하자면 원래 내 캐리어가 아니다. 여행커뮤니케이터란 직업을 가진 적 있는 딸이 버린 캐리어다. 내가 고장 난 바퀴만 새것으로 교환하고 막(?) 사용 중이다. 어디 가서 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은 상태다. 앞에 자리가 났지만 앉기를 망설이자 피곤한 누군가 금세 앉았다.
공항철도로 서울역에서 환승하며 자리에 앉았다. 항공사 제복을 입은 부기장이 옆에 앉았다. 제복의 양팔에 금색줄이 세 개면 부기장이고, 네 개면 기장이다. 부기장은 앉자마자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낸다. 운항 전 브리핑을 위한 준비려니 했다. 항공사 여자승무원들도 하나둘 타기 시작한다. 단 한 오라기의 일탈도 허용하지 않고, 단정하게 빗어 뒤통수에서 쪽진 머리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 '참 예쁘게 빗고 대한항공을 뜻하는 리본까지 달았네'가 아니고, 이 시간에 저렇게 단장하고 나오느라 무척 힘들었겠다. 언제 저 머리를 기댈 수 있을까? 쪽진 저 머리를 어디에 어떻게 기댈까 궁금하네.
무척 큰 캐리어를 들고 타는 젊은 여자여행객들이 있다. 저 큰 캐리어 안에 모든 것을 때려 넣었는지 핸드백조차 들지 않았다. 공항 가는 급행이 아니고 일반열차라 계속 사람들이 탄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동일한 항공사 승무원이 틀림없는데 서로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대한항공 객실승무원이 6000명이 넘으니 서로 알지는 못하더라도 출근길에 마주치면 서로 목례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노동조합 소속일 텐데...
7시 정각에 열차는 영종대교를 건넌다. 맞은편 큰 창으로 동쪽 하늘을 밝히는 붉은 여명과 하늘이 보인다. 적당히 떠있는 구름과 함께 한 폭의 완벽한 그림이다. 창 앞 가운데 좌석에 예쁜 여승무원이 귀에는 무선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며 미소 짓고 있다. 아들이 무선이어폰을 사용해 보니 딴 세상이라 했는데, 곧 보청기를 껴야 할 텐데 그전에 나도 함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7시 20분 인천공항 1 터미널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 일주일 방랑을 떠나게 된 연유는 프랑크푸르트 직항 왕복이 50만 원이라서다. 유럽 직항 왕복이 50만 원이라니... 그리고 티웨이항공 프리미엄 플러스 구독서비스가 내년 3월에 끝난다. 구독서비스의 가장 큰 장점은 비즈니스 무료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티웨이항공의 동남아 노선은 아예 비즈니스석이 없다. 유럽과 호주 같은 장거리 노선에만 있다. 그래서 혹시나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 가능할까 하며 반신반의하면서 프랑크푸르트 왕복 비행기표를 두 달 전에 샀다.
사고 보니 프랑크푸르트 가는 편의 비행시간이 14시간 20분이다. 이렇게 긴 비행기 타본 적 있나? 1992년 뉴욕 갈 때는 앵커리지를 들러서 갔다. 미국 서부나 유럽이 12시간 이내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러시아 영공을 우회하느라 두 시간 이상 더 걸리는 것이다. 만약 비즈니스 업그레이드가 안되면 어르신이 이코노미석에서 이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다. 함 시험해 보자꾸나!
A330-200의 비즈니스석은 18자리다. 비행기 탑승 직전, 게이트 앞에서 업그레이드가 될지도 모른다. 초조하게 탑승을 기다렸다. 다섯 명이 업그레이드가 되고도 비즈니스석은 세 자리가 비었다. 다행이다. 아니 대박이다. 50만 원에 산 비행기표로 누워갈 수 있다니...
티웨이항공의 비즈니스 세이버 좌석은 처음이다. 180도 풀 플랫에 조금 모자란 164도다. 1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식사는 두 번뿐이다. 식사의 질이나 양은 형편없지만(?) 불평할 만큼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맥주와 술은 유료다. 누울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의 평안정도가 아니라 기쁨을 준다. 7시간 정도 지났을 때 한강 작가의 대표작 '채식주의자'를 완독 해버렸다. 이렇게 단숨에 읽을 줄 모르고 한 권만 챙겨 온 것이 아쉽다. 할 수 없이 채식주의자를 이리저리 머릿속에서 굴려보며 이후의 긴 시간을 버텼다.
내가 알던 소설과는 격이 다르다. 톨스토이나 토스토옙스키의 소설과는 차원이 다르다. 독자로 하여금 단숨에 읽어내게 만들고, 긴 여운을 남긴다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다. 청소년이 읽기에 적당하지 않은 소설이라고 학교 도서관에서 퇴출될 만도 했겠단 생각이 든다. 외설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겠다. 어떤 이에게는 불편한 여운을 남길 수도 있겠다.
소설은 어떠한 상상도 가능하다. 읽어주는 독자만 있다면...
불편한 상상도 소설이다. 사실이 아니고 역사도 아니다. 도덕이나 정의를 소설에 들이대면 안 된다. 경험과 상상이 꿈을 꾸게 하고 소설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꿈을 꾼 자를 법과 도덕의 잣대로 재판할 수 없듯이, 소설도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읽기 불편하다고 남들도 읽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