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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Jan 16. 2017

"나는 너를 -해"

베르터를 읽다, 5월 30일


5. "나는 너를 - 해"         



내가 그 사람의 순수한 애정과 사랑 그리고 성실함을 너에게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되풀이해야 할 거야. (중략) 그의 시선 속에 숨어 있는 열정을 동시에 생생하게 표현하려면, 아마도 가장 위대한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할 거야. 아니, 그 어떤 말로도 그의 전 존재와 그가 하는 표현에 깃들어 있는 다정함을 표현할 수 없을 거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터의 고통, 정현규 역, 을유문화사, 29쪽.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는 것,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다고 하는 감정. 때로는 우리 모두가 사랑이라는 주체할 수 없는, 격양되고, 넘쳐서 흐르는 듯한 감정의 폭풍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그 감정을 단순히 어떤 우리가 알고 있는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사랑”이라는 말로 치환하는 것을 부족하다고 여길 때가 있다. 그 상투적이고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그 말로는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도 그의 저작 “Essays in love”에서 “나는 너를 마시멜로해”라는 말로 사랑을 고백하고, 아마 이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영화 러브픽션의 “나는 너를 방울방울해”라는 말과 같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 말로 사랑을 고백하곤 한다. 그런 낯선 언어를 사용함을 통해, 모순과 역설을 통해서 비언어적인 어떤 순간을 잉태해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언어는 사실상 이성과 논리의 작업이다. 문법에 따라, 문맥에 맞게, 언어는 통제되고 규칙에 따라 사용된다. 우리는 하지만 (어떤 비이성적이고 이성에서 초월적인 감성을 논하기 위해) 담을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쩌면 표현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언어를 비틀어서 사용한다. 왜냐면 우리가 서로에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이라는 이 언어적인 수단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행동”, “제스처”등은 상당히 자의적이다. 아, 자의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객관적인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언어를 통해서 감정을 표현해주기를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요구한다. 그 요구를 받은 사랑하는 이는 요구에 따라 행동을 이행하겠지만, 언어적인 객관의 산물로만 내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언어가 표현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의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하며 언어를 비틀어서 사용한다. 이 언어 또한 일상적인, 일반적인 언어 사용과 벗어나 있기 때문에 해석의 단계를 거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표현하는 그 발화를 통하여 그 사람의 애정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 논리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간에 불가한 이해가 성립된다. 그것이 사랑의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사실상 이(사랑하는 연인 간의 특수한 언어 사용을 통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는 것) 또한 착각이며 자의적인 결단일 수 있다. 하지만 또 확인을 위해 말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모순. 아니 언어의 모순일까. 아니, 결코 합일될 수 없는 두 사람이 이루어내는 사랑이라는 것의 모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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