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는 남편의 옛 직장이 있었던 곳이다.1만 년의시간여행지! 시간을 거슬러 보고 느낄게 많은 나라는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추억이 있는 곳이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은 쉬웠다.
코로나가 시작되자 많은 활동이 제약을 받아 암울하였다. 거의 숨쉬기조차 힘든 멈춤의 순간이었다. 약 3년 동안의 마스크 속에 갇혀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깊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감염되고 전염의 두려움 속에서잘 버텨준 덕분이다.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려 격리와 치료를 받으며 절망보다 희망을 기다리니 살 수 있었다. 코로나를 앓고 살아나니 하이브리드 면역을 보유했다며 한동안 위안이 되었다. 생명보다 더 귀하고 강인한 게 없는지 잘 이겨내서 다시 사는 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 기적처럼 다시 일상이 찾아오고 꿈꾸던 일들을 향해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붐비기 시작한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얼마만의 여행인가!!
드디어 튀르키예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스친다.
생애 첫 여행이 될뻔한 날의두려웠던 기억은여전히 나에게 트라우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신문물을 보여 주실 생각으로 장에 가자고 하셨다.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읍내에서 한참 들어간 시골이다. 읍내 가는 길은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나는 8살이 되도록 읍내에 가볼 기회가 없었고 버스를 타볼 기회도 없었다. 읍내는 부모님께서 농사지은 것을 팔러 가실 때가 전부였다. 아버지와 비포장된 신작로에서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렸다. 어린 심정에 버스를 탄다니 기쁨 반, 두려운 반의 감정이 왔다 갔다 하면서 떨리기만 하였다. 버스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 꼬부랑 산길을 내려와 우리 앞에 멈추었다. 아버지는 막내딸의 손을 붙잡고 버스를 타자고 하셨다. 그 순간 심한 어지럼증이 오면서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막내딸은 아버지와 잡은 손을 뿌리치고 엉엉 울며 주저앉았다. 첫 여행이 될 읍내 구경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행의 첫 신고식을 눈물로 치른 뒤에 아버지는 막내딸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이곳저곳 데려가 주셨다. 나는 읍내를 벗어나 도시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버스 울렁증은 사라졌고 그때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다.
이제 여행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세게 작동하고 있다.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해 미리 걱정을 하지 않으려 한다. 내게는 아버지께서 어릴 때 맞춰준 예방주사의 면역기능이 발휘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자. 건강하게 잘 돌아옵시다."
기내서비스 와인은 우리의 여행을 늘 기원해 준다. 튀르키예 국토를 누빌 여정을 점검하며 "브라보"다.
꿈은 안될 것 같은 것에 도전하는 것!
"나이가 들어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사라져 나이가 드는 것"
30일간의 일정을 보니 열정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여행은 이스탄불에서 시작하여 부르샤, 트로이, 차나칼레, 에페소, 안탈리아, 콘야, 오 브룩 한, 괴레메, 카파도키아, 바흐르만마라스, 넵룻, 시바스, 수멜다, 삼순, 샤프란블루를 거쳐 다시 이스탄불로 그리고 쿠사다시로 가는 여정이다. 쿠사다시에서는 그리스로 향하는 배를 타고 성서에 나오는 요한의 전도여행지를 돌아보고 올 생각이었다.
1년 후 아니 10년 후 오늘의 여행이 너무 탁월한 선택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 또한,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여 저장하고 싶었다. 어쩌면 소중한 기억들이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쓰고 싶은 마음 그 하나라도 만족한다.
온몸으로 보고 걷고 느꼈던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슬픈 순간이 오더라도 기록이 있기에 항상 나는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