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소에서 파묵칼레(Pamuk kale)와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를 보기 위해 3시간을 넘게 달렸다.
넓은 평야지대는 하얀 솜꽃을 달고 목화가 끝도 없이 피어있다. 어릴 때 나의어머니는 딸을 시집보낼 때 쓰신다고 (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손바닥만 한 밭에 목화를 심으셨다. 해마다 따놓은 목화솜은 이불한채 분량도 안되었지만어머니의 수작업을 통해 혼수이불이 완성되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혼수품이 되었다. 수십 년이 흘러 잊고 살았던 그 사랑을 낯선 이 길에 와서야 기억을 더듬다니. 차에서 내려 목화를 만져본다. 초등학교 때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는 길의 막 피기 전의 목화는 우리의 간식거리가 되어 주었다. 목화를 가득 실은 트럭기사가 멈추더니 목화를 한 움큼 건넨다. 이곳의 겨울을 감싸줄 목화솜이 부드럽고 따스하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 스치는 장면은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 그냥 지나칠뻔한 시간들을 성찰하게 한다.
평야지대를 달려 어느새,석회암으로 덮인 하얀 산인 파묵칼레가 보인다.
파묵칼레는 터키 남서부에 있는 아름다운 석회암 지대로,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튀르키예어로 ‘파묵(pamuk)’은 목화, ‘칼레(kale)’는 성이라는 뜻이란다. 새하얀 석회암 바위들이 마치 수많은 목화가 만개한 것처럼 장엄하게우뚝 서 있어 ‘목화의 성’처럼 보인 데서비롯되었다.
미리 예약된 숙소에 짐을 풀고 석류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마을을 산책하듯 걸었다. 담장의 석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안녕하세요?" 한국말이 들린다. 해맑게 미소 짓는 현지인이다. 그는 한국에도 가봤고 한국에 친구가 있다고 한다.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집으로 뛰어간다. 그의 손에는 석류가 들려있다. 고마운 인연이다.
마을의 입구로 나오니 오리들이 여유롭게 헤엄치며 노니는 호수가 보인다. 산 위에서 흘러내린 온천수는 파묵칼레를 맑게 비춰주고 있다. 산 아래서 바라보는 파묵칼레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하얗다.
온천수는 경사면 따라 흐르면서 침전 또는 응고되어 단단한 석회층이 접시모양으로 쌓여있다. 매년 1mm 정도 자라서 1만 4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탄산칼슘염 결정체의 온천이 되어 있다.
파묵칼레! 6년만에 만난 그리운 빛의 향연은 몇개의 쟁반에만 사람들이 가득하다. 갈수기인지 말라 있는 곳이 많아 하얀 석회석 세상이나마 만족한다. 하늘닮은 물빛이 탄산칼슘이 만든 석회암 둥근 접시에 차고 넘쳤는데 아쉽다. 온천수 대부분을 호텔 수영장으로 끌어가는 바람에 석회붕도 황폐화되고 있다니! 정부의 정책이 아쉽다. 입구에서 신발대신 맨발걷기로 접근하게 되어 있는것 만은 잘한 것 같다. 수영복 입고 수영대신 포즈를 취하는 사람, 천사날개를 빌려 사진찍는 사람, 유럽인과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언어가 들리는 이곳이 파라다이스인양 하나같이 환하게 웃는다. 신발을 비닐봉지에 담고 조심조심 발바닥의 촉감을 느껴본다. 하얀 석회수가 발가락을 간지럽힌다. 석회층과 그 위로 흐르는 온천수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으로 빛난다. 커다란 쟁반은 한 번쯤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넘친다.
온천탕 위로 페허가 된 도시의 흔적이 있다.바로 히에라폴리스다.트로이 전쟁에서 여인들을 이끌고 그리스군과 싸우다 죽은 여인 히에라! “성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이 있는 도시. 페르가몬왕국에 의해 세워졌으나 로마의 점령으로 번성하였으며 치유력이 있는 온천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로마황제를 비롯하여 크레오파트라도 방문하였다니 관광객들도 황제와 클레오파트라의 기분을 내고 싶으면 요금내고 들어갈 수 있다. 온천에는 펌프 수도를 퍼올려 지하수 맛을 음미해볼 수도 있다.
히에라폴리스 대극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은 흔적만 남아 에페소와 비교된다.
예수님의 12제자였던 빌립보와 바돌로메는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뱀을 숭배하는 신전에서 기도를 통해 뱀을 죽였을 뿐 아니라 사나운 뱀에게 물린 사람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의 국교는 뱀을 숭배하는 종교였는데 총독과 뱀숭배 사제의 관점에서는 이들은 이적 행위자일수밖에.
결국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로마제국의 황제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천지를 흔드는 지진이 일어났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쓰러졌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후 지진이 잦아들자 시민들은 무고한 빌립보와 바돌로매를 죽이려했기 때문에 하늘이 노한 것이라며 석방을 요구했지만 이미 빌립보는 죽은 뒤였으며 바돌로매는 석방되었다.
이렇게 죽은 빌립보는 히에라폴리스 뒷산 언덕 높은 곳에 묻혔으며 선교여행자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1.8km의 언덕을 오른다. 우리는 산위 빌립보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페허가 된 유적지를 돌아보며 죽음의 도시처럼 암울한 생각이 든다. 당시에도시는 부유했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향한 성경메시지가 많은 의미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