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몬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 때문이었다 -
나를 온전히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났다.
4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고, 간호사로서 커리어를 쌓으며 평온하고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그 평화 속에 남편이 조심스레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사실 자신이 없었다.
'부모'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상처가 내 안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자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내가 과연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임신을 계획했다.
그러나 마음을 먹는다고 생명이 뚝딱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30대 중반이라는 나이 탓인지 8개월의 자연 임신 시도도, 난임 병원에서의 인공수정 2회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주치의는 더 지체하지 말고 시험관 시술을 권했다.
로또 당첨보다 어렵다는 시험관 1차 시도.
딱 한 번만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하려 했던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아이가 찾아왔다.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이었을까, 아니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을까.
열 달을 품어 낳은 아이는 정말이지 작고 천사 같았다.
꼬물거리는 손가락,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보며
이 세상에서 아이를 지켜줄 사람은 오직 우리 부부뿐이라는 비장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산후조리원 침대에 누워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
행복감 대신 억눌러왔던 옛날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밤만 되면 베개가 젖도록 눈물이 흘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자식'
그 말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사랑은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내 품에 안긴 이 작은 생명은
울어도, 떼를 써도, 기저귀에 실수를 해도 사랑스러웠다.
'사랑받기 위해' 눈치를 볼 필요도,
하고 싶은 말을 삼킬 필요도,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 순간, 30년 넘게 나를 지탱해 온 믿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도 그랬어야 했는데.'
'아무 노력 없이, 그냥 존재만으로 사랑받았어야 했는데.'
아들에게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나는 가장 비참해졌다.
'내가 지금까지 산 인생은 뭐였지?
왜 나는 부모와 형제에게 사랑받지 못했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사람들은 말했다.
"출산 후 우울증은 호르몬 변화 때문이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
하지만 나의 우울증은 호르몬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얕은 깊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30년간 억눌러왔던 내면 아이가 터뜨리는 비명이었다.
아기를 볼 때마다 끔찍한 상상이 겹쳐졌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연약한 존재를 때린다고?
밥도 제대로 안 주고 방치한다고?
매일 폭언을 쏟아붓는다고?'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그 학대가, 바로 어린 시절의 내 일상이었다.
그 지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는 가면을 쓰고 버텼던 것이다.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제부터 전쟁 시작이야", "육아는 현실이야"라며 겁을 줬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나에겐 간호사로서 훈련된 본능과,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부터 찾는 '복구(Restorative)' 성향이 있었다.
아이가 열이 나도 다른 부모들처럼 허둥지둥 응급실로 뛰어가기보다, 침착하게 체온을 재고 미온수 마사지를 하며 덤덤하게 상황을 통제했다.
아이가 왜 우는지, 어디가 불편한지 캐치하고 해결해 주는 일은 내게 익숙한 업무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매일 밤, 머리맡에서 나직이 책을 읽어주고 아이의 온기를 가슴 가득 품어 재웠다.
곤히 잠든 귓가에 기도하듯 속삭였다.
너는 오직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며,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사랑스럽다고.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이자, 내 생의 최선이었다.
유일하게 힘든 건 '잠'이었다.
특히 100일의 기적이 오기 전까지, 3-4시간마다 깨는 아이 탓에 내 수면 욕구는 바닥을 쳤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면역력이 떨어져 평소에 걸리지 않던 축농증과 한여름에도 감기를 달고 살 정도였다.
하지만 그 극한의 피로 속에서도
아이가 미워 보이거나 화가 치밀어 오르진 않았다.
그냥 '아이가 크느라 고생하는구나', '엄마니까 당연히 해줘야지'라며 묵묵히 버텼다.
그런데 그 '당연함'이 나를 점점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새벽 3시, 잠투정하는 아이를 안고 거실을 서성이던 밤이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아이 등을 토닥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며칠째 잠을 못 자서 좀비 같은 상태인데도,
이 아이한테 짜증 한 번 안 내고 있잖아.
열이 나도, 똥을 싸도, 울어도 그냥 해결해 주고 있잖아.
대단한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라, 부모라면 당연한 거잖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왜 우리 부모는 못했지?'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길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이유 없이 맞고, 아플 때조차 무관심했지?'
'능숙한 간호사 엄마'가 아이를 완벽하게 케어할수록,
내 안의 '방치된 내면 아이'는 비참함에 몸부림쳤다.
"봐, 너도 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냥 사랑해 주면 되는 거였어. 그런데 그들은 네게 왜 그랬을까?"
잠든 아이 얼굴 위로, 억울함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육아가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육아가 할 만해서,
사랑하는 게 너무 쉬워서,
그래서 미칠 듯이 아팠다.
백일잔치를 며칠 앞둔 어느 날,
5년을 키우던 고양이가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남은 한 마리마저 입양을 보내야 했다.
그 상실감과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이의 백일잔치를 앞두고 충분히 슬퍼하지 못해서였을까.
'사랑했던 고양이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어떻게 한 생명을 키울 수 있겠어...'
내 곁을 지켜주던 작은 생명들이 떠나가자,
집안은 더욱 차가운 적막에 휩싸였다.
텅 빈 집, 아이가 잠들고 나면 늪처럼 깊은 무기력함에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복직을 준비하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홀로 남겨진 시간.
걷잡을 수 없이 과거로 빨려 들어갔고,
우울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특히 아빠와 오빠에 대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왜 나를 때렸어?
왜 보호하지 않고 방임했어?
당신들이 가족이야?'
내 안에서는 매일 전쟁이 벌어졌다.
한 아이는 가족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고,
다른 한 아이는 가족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래도 가족인데, 낳아준 부모인데 그렇게까지 미워하면 안 되지. 다 이유가 있었을 거야'라는 착한 아이의 자아와,
'아니야, 난 지금 그들을 끊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살려줘.'라고 외치는 내면 아이의 자아가 피 튀기게 싸웠다.
슬픔과 분노, 죄책감과 살의가 뒤엉켜 마음은 폐허가 되었다.
더 이상 혼자 힘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나조차 무너지면 이 작고 소중한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절박함 하나로, 지역 보건소 정신건강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약물 치료가 필요해 보여요."
상담사의 권유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그렇게 엄마가 된 직후, 기묘하게도 나의 엄마와 가족을 지우기 위한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치료를 받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이를 겨우 재우고 나온 밤,
억눌려 있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눈물을 쏟으며 남편에게 내 마음속 가장 어두운 살의를 고백했다.
"여보, 내가 죽어서라도 그 사람들이 평생 죄책감 속에 살게 하고 싶어. 내 목숨을 끊어서라도 복수하고 싶어."
나를 망가뜨린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남편의 눈물이었다.
"그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죄책감 속에 살 거야.
내가 당신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평생 내가 그리고 우리 아들이 지옥 속에 살 거야."
울먹이며 무너져 내리는 남편의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죽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남편의 눈물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밤, 나에게 남은 것은 갈 곳 잃은 분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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