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술실 간호사가 꿰맬 수 없었던 것들 -
조용한 방안. 침대에 힘없이 누운 채 그때의 나를 천천히 돌이켜 본다.
어쩌면 각자의 결핍과 약함에 눈이 먼 채 서로를 할퀴었던 장님들이 아니었을까.
'사랑'이 아닌 '인정 욕구'에 갇혀 화목이라는 허상을 꿰매려 들었던 나의 집착도, 폭력 뒤에 숨은 오빠의 비겁함도, 방관으로 일관한 아빠의 무능도 모두 자신의 약함에 넘어진 결과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늘 눈치 보고 위축되던 아이가, 세상 밖에서는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전파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중 대학교정은 해방의 공간이었다.
전공 공부와 국가고시 준비라는 무게가 어깨를 눌렀으나, 도서관 폐관 안내 방송을 들으며 가장 늦게 문을 나설 때의 성취감은 집안의 눅눅한 우울을 걷어내기에 충분했다.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를 가두던 ‘발표 울렁증’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온 일이다.
조별 과제와 발표 수업이 늘어날 때마다 도망치는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모두가 꺼려하는 발표자 자리에 먼저 손을 들어 자원했다.
꼼꼼하고 계획적인 성격은 강의실에서 빛을 발했다.
보건교사처럼 모의 수업을 이끌고, 수백 명의 공학도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산업안전교육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프로듀서처럼 역할을 분배하고 스케일을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잠재된 리더십이 깨어났다.
지역사회 실습 때는 치어리더 경력을 살려 직접 만든 건강체조로 마을 주민들과 호흡했고, 결국 지역 체조대회 1등과 실습최고 점수를 거머쥐었다.
늦은 밤 기숙사 침대에 둘러않아 친구들과 서로의 아픔을 나누던 그 시간들.
그때 알았다. 행복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가장 가난하고 치열했으나, 스스로의 유능함을 처음으로 발견했기에 그 시절은 생애 가장 찬란한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현실은 여전히 가혹했다.
학비 문제로 휴학 후 복학했을 때, 당장 다음 학기 생활비와 기숙사비가 바닥났다.
집에 도움을 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침묵과 절망이었다.
그때 손을 내민 건 가족이 아닌 후배 지선이었다.
후배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사히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내 곁에는 늘 피보다 진한 타인의 선의가 있었다.
졸업 후 대학병원 소아과 병동에 취업했으나, 3교대의 고단함 속에 8개월 만에 사직서를 던졌다.
환상 대신 현실을 택하며 상근직이 가능한 수술실 간호사로 전향했다.
어릴 적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익혔던 ‘눈치’는 수술실이라는 긴박한 현장에서 남다른 유능함으로 평가받았다. 칭찬받을수록 내 안의 아이는 숨죽여 울었지만, 경제적 독립은 그 슬픔을 상쇄할 만큼 컸다.
독립과 동시에 가족의 구멍 난 곳을 메우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오빠의 보험을 설계하고, 엄마를 위해 대학병원에서 조현병 치료를 받게 도와드렸다.
매달 보내는 용돈은 효도이기 이전에, 내가 이 집안에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받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수술실 간호사가 아무리 정교하게 바늘귀를 꿰매도,
사람의 인격에 난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성인이 된 오빠의 주먹이 얼굴을 가격하던 날,
물리적인 통증보다 깊은 자상을 남긴 건 아빠의 방관이었다.
"네가 참아라."라며 가해자를 두둔하는 아빠를 보며 깨달았다.
이 관계는 회복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오빠의 결혼을 앞두고 걸려온 전화는 위선의 정점이었다.
"다른 집처럼 살갑게 도와주지 않아 속상하다"는 그의 말에 참아왔던 진실을 터뜨렸다.
"오빠가 정말 가족이고 동생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때릴 수 있었어?
나한테 한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한 적은 있어?"
구체적으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저 원만한 결혼을 위해 치워야 할 돌멩이 하나를 골라내는 듯한 가벼움뿐이었다.
매달 드리기로 한 용돈을 나 혼자 챙기고 있었을 때도 돌아오는 건 타박뿐이었다.
"왜 매달 주지 않았냐"는 나의 물음에 짜증을 내며 새언니 앞에서 체면이 깎였다는 원망을 했다.
결혼 전, 남들처럼 경제적 지원을 받기보다 평생 월세만 살던 아빠를 위해 LH임대주택 보증금을 내드렸다.
그럼에도 나를 낳아준 부모이기에 당연하다고 믿었던 마음이, 실은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방치한 채 얻어낸 평화였다.
비극의 전조는 부모님의 건강검진에서 시작되었다.
엄마는 내가 챙길 테니, 추후 아빠의 검진과 진료는 오빠가 맡아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엄마의 검진 결과는 참담했다. 당장 입원하여 인슐린 치료를 시작해야 할 정도로 혈당 수치가 위험하다는 내분비내과 의사의 소견이 떨어졌다.
급히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걱정이 아닌, 육아 중이니 갈 수 없다는 귀찮음 섞인 말투였다.
"알아서 하라"는 방관의 목소리.
그 순간, 마지막 남은 기대를 거두었다.
"너한테 전화한 내가 병신이다."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비로소 거친 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에게 던지는 마지막 신호였다.
핏줄이라는 이유로 영혼을 갉아먹는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었다.
본인의 처자식만 소중하다면, 그 세계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길 바랐다.
더 이상 형제도, 가족도 아니었다.
썩어버린 조직을 잘라내듯, 내 인생에서 그의 자리를 영구히 도려냈다.
지독한 착한 아이 증후군에 갇혀 나조차 나를 모른 채 살아왔던 긴 세월.
이제야 비로소 그 눈먼 시대를 지나, 거울 속에 비친 평범하고도 상처 입은 나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착한아이증후군 #K장녀 #가족절연 #상처 #심리에세이 #간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