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에 활동적으로 젊게 사셔서 난 첨에 울어머니가 흰머리도 없는 분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완전 백발이셨다.
한 날은 어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신 김에 어머니 염색을 해 드린 적이 있었다.
세상에, 숱이 얼마나 많으신지, 두피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토록 빼곡하게 많은 머리가 다 흰색이었다. 울엄마 머리 염색을 해 드릴 땐 겨울 산 같아서 바닥이 휑하니 다 보였었는데.
자칫하다간 염색제가 모자라겠단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어머님들은 뚜껑 볼륨을 살리는 것에 진심이시게 마련인데, 우리 시어머님은 머리숱이 너무 많아 늘 고민이셨다. 어머니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더벅머리, 봉두난발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하하
그래서 흔히들 야구모자라고 부르는 볼캡을 항상 쓰고 다니셨다.
가뜩이나 머리가 많아서 고민이시니 긴 머리 스타일을 하실 리가 만무했다.
더워 죽겠는데 모자를 안 쓸 수가 없다
보통 남자들은 '긴 생머리'에 대한 로망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남편은 항상 '숏컷이 예쁘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너는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려" 라는 엄마의 세뇌에 짧은 머리를 유지했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웨딩드레스에 어울리는 업스타일을 하기 위해 최소한의 길이를 만들어야 해서 서너 달 기르느라고 갑갑해서 혼났다.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속눈썹도 떼지 않은 채로 곧장 이대 앞으로 달려가 머리를 역대급 숏컷으로 바꿨다. 결혼 후에도 남편이 긴 머리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도 굳이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그러다 남편이 하는 게 다 꼴 보기 싫어지는 권태기가 오자 나 혼자 은밀한 오기 같은 걸 부리게 됐다.
숏컷이 좋아? 흥, 그럼 난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겠어.
그런데 사실, 긴 머리 스타일을 유지한다는 건 굉장히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일단 머리 한 번 감는 것만 해도 샴푸도 많이 든다. 물도 전기도 꽤 써야 한다. 말리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려 허리랑 등이 에고에고 비명을 지른다.
머리가 길면 헤어핀, 머리띠 등 장신구도 고루 필요해진다.
미용실에서 펌을 해도 '기장추가'가 있어서 가격이 비싸진다.
머리가 길면 아이를 키우면서 머리끄댕이 잡힐 일도 많아진다. 아이들은 전생에 엄마의 머리칼에 웬수라도 진 존재들인지, 머리채를 한번 잡히면 눈앞이 노래졌다.
그 모든 비용과 노력을 들이면서도 어머님과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의 온도차가 맞부딪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나> 임을 목청껏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경상도 어머님의 입김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둘이 똑같이 한방씩 말 공격을 했다 치면 어머니는 '요즘 애들 무서워서 말이나 하겠니' 하며 하극상의 피해자가 되시고 며느리인 나는 '어머니께 대드는 본데없고 못돼 먹은 아이'가 되니, 전적으로 내게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남편이 내게서 '엄마 같은 느낌'을 느끼고 싶어 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고, 나는 당신의 엄마가 아니고 '사랑할 아내'라는 점을 무의식 중에 강조하고 싶었다.
자꾸 숏컷이 예쁘다고 해서 내가 거기에 맞추는 듯한 그 느낌도 별로였다. 나는 긴 머리도 좋아하는데.
나 머리 어때?
머리가 목을 지나 어깨로 점차 내려오자 남편은 "응, 머리 새로 했네" 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어깨를 한참 지나 등으로 쭉쭉 내려오자 남편은 이제 어느 정도 포기한 것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랑 평소처럼 점심밥을 먹고 있는데, 남편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항상 짧은 머리가 제일 예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야, 당신 머리가 이만큼 길어지고 보니까 또 긴 머리도 참 예쁜 스타일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