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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줄 알았다는 흔한 말

by 로다비 Mar 20. 2025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식어버린다.
‘그럴 줄 알았으면 말 좀 해주지 그랬어?’ 반감이 들곤 한다.
우왕좌왕하고 상황 속에 있을 때는 샌님처럼 입 다물고 조용히 있다가, 나중에 상황이 다 정리되고 나면 그제야 내 그럴 줄 알았어. 정말이지 그 말을 들으면 속이 상한다. 그에 대한 모든 감정이 그만 짜게 식고 만다.
일상 속 어디에나 있는 뒤늦은 심판자들.

그랬어?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좀 말해주지 그랬어?

사람은 상황 속에서 우왕좌왕할 때, 외부의 조언을 가장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일이 끝난 후에야 거봐,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사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음에는 분발하게 되는 원동력이 될까?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 나는 내 삶의 조각을 나누고 싶지 않다.
과연 당신이 어디까지 그럴 줄 알런지, 맞춰봐라 메롱 같은 어깃장이 든다.

정말 알고 있었어?



오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첫아이를 낳고 딱 나흘째 되던 날, 가슴에 핵발전소가 가동되었던 비운의 여자다. 아이는 두세 시간에 4-50미리 먹을까 말까 한데, 나는 삼십 분 전후가 다르게 젖이 차올랐다.
열감이며 양 자체가 엄청났다.

젖 때문에 전신에 열이 펄펄 끓고, 온갖 좋다는 방법들을 동원하고, 갖은 방법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아 한밤의 응급실에서 진통제를 투여하며 모유를 뽑아내고, 밤새 잠은커녕 물 한 잔도 함부로 못 마시고, 밥 먹을 새도 없이 씻을 겨를도 없이 젖 때문에 고통받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며느리 조리한다고 친정 가서 잘 지내고 있느냐는 전화였다. 남편이, 다비는 요즘 젖몸살 때문에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애쓰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내 그럴 줄 알았다!



???
우리 어머니는 언제부터 아셨을까. 내가 그렇게 아파질걸. 그런데 왜 한마디 언질도 해주지 않으셨을까.
아기 낳고 퇴원해서 친정으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셔서 종일 나와 함께 계셨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는 말씀을 일언반구 하시지 않았다.

대체 어떤 점 때문에 이렇게 될 줄 알게 되셨을까.
내가 아이에게 젖 물리는 모습이 어설퍼서?
결혼하고 어머니와 목욕탕을 갔을 때, 내 가슴 모양을 딱 보아하니 앞으로 젖이 많이 만들어질 상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말버릇처럼 내뱉으신 말이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너무 힘들고 아픈데. 그럴 줄 알았으면 쫌 알려주지, 쫌!!! 화가 났다.
뭔가..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며 좋은 엄마가 될 준비를 해왔는데, 거봐 너 꼬라지 보아하니 그렇게 될 줄 나는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하며 한 숟갈 얹는 말.

진짜 알고 계셨던 걸까? 아니면, 결과가 나온 후에야 슬쩍 가져다 붙이는 말일까?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결국, ‘나는 알고 있었고, 너는 몰랐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속엔 은근한 우월감이 깔려 있다.
 
이 속에 잘 될 거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도, 왠지 쓴맛이 난다. 

근거 없이 덮어놓고 하는 말은 곧, 그냥 으레 내뱉는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이 든다.

나를 아낀다고, 예뻐한다고, 잘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도 정말 그러했다면 내가 낭떠러지로 번히 굴러가고 있는 걸 아셨다면서 어떻게 언질 한마디 해주지 않으셨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 말 한마디에, 야속함과 서운함과 허탈함 분노 등 오만가지 잡탕 같은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쓸데없이 어머니한테 내 이야기 전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냥 담부턴 어머님이 어떤 걸 질문하셔도 모든 게 다 잘되고 있으니 아무 걱정도 말고 신경 쓰지 마시라고 대답하라고 강조했다. 내가 결국 입원하게 된 것도 알리지 말고, 모유 펑펑 나와서 아기는 잘 먹고 잘 자고 쑥쑥 크고 있다고 말하라고 했다.



보통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는 다신 안 보면 그만이다. 나는 그런 <예언자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시어머니와는 그럴 수 없으니 기회를 봐서 말씀을 드렸다. 저 그때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정말 마음 상하고 힘들었어요_라고. 그 뒤로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말씀을 내게 하시지 않으셨다.
아니, 어쩌면 그다음에도 두어 번은 더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이후로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셔도, 나는 어머니 말씀을 조금은 귓등으로 들어야겠다 마음먹기도 했다.
내가 어머니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는 것은, 목소리가 크고 앞서 나가시는 어머님과 잘 지내고 싶은 내향인 며느리 나름의 생존법이요 사랑 방식이다.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고, 조금이라도 더 잘 지내려면, 나만의 방법이 필요했다.

그치만 속으로는 생각한다. 그 말이 듣는 이에게 얼마나 허탈하고 무력감을 주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말했으면 좋겠다.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나는 예언자 말고 동행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내 곁에도 그런 사람이 남았으면 좋겠다.
그럴 줄 알았어 대신, 어떡해,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함께해 주는 사람.




#예언사역 정중히 거절합니다
#저는 오늘을 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사실 우리엄마가 입에 달고 사는 말




나도 같이 알자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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