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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Soo Kim Oct 22. 2023

#9. 호수에도 경계가 있나요?

일곱 번째 정거장. 볼리비아 태양의 섬(Isla del Sol)

1시간만큼의 무게


티티카카 선착장


한 도시를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코타카바나Copacabana의 색은 단연 푸른색일 게다. 흙으로 벽돌을 빚어 칸칸이 채운 붉은빛의 도시가 쿠스코라면 코타카바나는 하늘과 호수가 맞닿아 끝없이 퍼져나가는 차갑고 깊은 푸른빛의 도시처럼 느껴진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 호수는 그렇게 세상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티티카카 호수El lago TiTicaca를 소개하자면 뒤따라 오는 수많은 숫자들의 향연을 빼놓을 수 없다. 지구에서 7번째로 높은 고도(3812m)에 위치한 호수로 남미에서는 1번째, 전 세계에서는 18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2개의 나라가 영토권리를 가지고 있다. 깊고 넓은 바다 같은 티티카카 호수는 오랜 세월 페루와 볼리비아 사람들의 삶 속 깊숙하게 관여해 왔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인근 도시의 발달로 오염정도가 빠르게 높아지고 있어 주변 사람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기도 하다. 



코파카바나에 도착하자마자 태양의 섬Isla del Sol으로 가는 보트표를 끊고 잠시 짐을 맡긴 뒤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묵직한 무게감을 가졌던 쿠스코와 달리 코파카바나는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 드는, 젊음의 에너지가 호수와 함께 출렁이는 곳이었다. 코 끝을 통해 전달되는 청정한 공기, 파도처럼 부서지는 잔물결, 거칠 것 없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이 코파카파나와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각양각색의 여행자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쇼핑도 하고 기분 좋게 군것질도 하다 보니 어느새 예약해 둔 보트 시간이 가까워졌다. 맡겨둔 짐을 찾아 여유롭게 선착장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탈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왜? 왜!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어렴풋한 생각! 아뿔싸... 페루와 볼리비아는 호수를 사이에 두고 무척이나 가깝게 연결되어 있지만 1시간의 시차가 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국경을 넘으면서 시간의 경계도 함께 넘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이야. 호수가 삼켜버린 도시의 경계 때문에 그야말로 멘붕이 온 것이다.


선착장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며 매달리기도 했다가 투정을 부려 보기도 했지만 직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을. 시간을 착각한 것은 명백한 나의 실수였고, 그 실수를 자기에게 보상하라는 것처럼 들렸을 테니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결국 다시 티켓을 구입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2명의 대학생과 함께 태양의 섬으로 향하는 보트에 올라탔다. 


배가 도착하면 입장료를 받으러 주민 대표가 나온다.


2시간 남짓 걸렸을까, 보트는 태양의 섬 남쪽 유마니Yumani 선착장에 도착했다. 입장료를 지불하기가 무섭게 한 꼬마 녀석이 달려와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숙소는 정했어요?"

"숙소가 없으면 내가 소개해줄게요."

"나를 따라와요."

"따뜻한 물도 나오고 카페도 함께 있어요."


숙소 이야기를 하다가 별 관심 없이 대하니 이내 질문의 주제를 바꿨다.

"어디서 왔어요?

"중국인이에요?"

...


물멍! 섬멍!


태양의 섬은 원시 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 울퉁불퉁 솟아 나온 바위와 정리되지 않은 나무들로 한 눈에도 거칠고 척박했다. 자동차는 고사하고 그 흔한 시멘트 길 하나도 없다. 가파른 경사의 돌계단은 4,000m 높이에 있는 마을로 이어진 유일한 길인데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정신도 몽롱해지는 것 같다. 이 와중에도 꼬마 녀석의 이야기는 멈출 생각을 않는다. 못 이기는 척하며 꼬마 녀석의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사실은 더 이상 걸을 힘도, 말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내게 그것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호수 입구에 위치한 숙소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만큼 조식도 없고, 화장실과 욕실도 공동으로 써야 했다. 따뜻한 물은 둘째 치고, 문고리, 수압, 삐걱대는 침대, 그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짙푸른 호수 위 빛나는 윤슬과 그 사이를 가르 지르는 조각배는 완벽한 호수뷰를 자랑했다. 아침에 눈을 떠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고, 한참을 앉아 바라봐도 질리지 않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니 잠시 쉬어가는 여행지로 제격이었다.


숙소에서 보이는 티티카카 호수와 계단식 논밭


태양의 섬에 터전을 두고 사는 인디오들은 오랫동안 농사와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해 오다 최근 들어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집을 수리하고, 기본적인 가구를 들인 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렇다고 해서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서비스 마인드까지 기대할 순 없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장착하고 다소 거칠어 보이기도 하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성한 땅에 허락도 없이 여행자들이 밀려들었으니 못마땅할 법도 하다. 



태양의 섬에는 잉카제국의 기원인 망코 카팍Manco Cápac의 전설이 남아있다. 아직 빛이 생겨나기 전, 어둠으로 가득한 태양의 섬에 신성한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바위에서 태양이 떠오르며 빛이 생겨났다. 빛 사이로 인티Inti(태양의 신)의 아들인 망코 카팍과 인티의 딸 마마 오크요Mama Ocllo가 강림했고, 티티카카호수와 태양의 섬은 잉카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또 다른 버전의 전설도 있는데 공통점은 바위와 태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디오들은 전설의 바위가 있는 곳에 사원을 지었고, 지금까지 꽤 온전한 형태의 유적으로 남아있다. 유적은 관리되지 않아 폐허가 되었어도 태양의 섬에 사는 인디오들은 여전히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시대의 삶을 재생하며 잉카시대를 살고 있는 듯 느껴진다. 


잉카유적과 대조적인 스페인 교회


태양이 넘어가는 시간, 어른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남아있는 돌들을 마저 옮겨야 하고, 염소와 당나귀도 제 집으로 보내야하는데 동네 꼬마녀석들도 한 몫한다. 하지만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에겐 외지에서 온 이방인들이 더 신기하고 궁금한가 보다. 나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따라오던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서로 겸연쩍어하며 작은 미소를 띤다.



골든타임



해 질 무렵이 되어 배도 채울 겸 적당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6각형 건물의 4면이 통창으로 되어 있어 티티카카 호수 위로 쏟아지는 석양의 향연을 지켜보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듯했다. 부지런히 하루를 살았던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마지막 빛을 뿜어내며 작은 섬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려는 찰나를 1열에서 관람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지만 석양이 내리쬐는 풍경 앞에선 식욕도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수저를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가 온몸으로 태양 앞에 나섰다. 실눈을 뜨고 바라본 호수엔 붉은 수평선이 길게 이어졌고,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한 줄기 태양빛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실로 장엄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섬은 온 몸으로 오렌지빛 태양을 받아냈다. 섬으로 내려앉은 태양빛은 머리부터 콧잔등, 발 끝까지 어느 한 곳 지나치지 않고 나를 훑어갔다. 마치 이곳이 '태양의 섬'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이. 어떤 카메라로도 절대 담을 수 없는 풍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 편지를 쓰는 사람, 연인과 손을 마주 잡고 마지막 태양 빛을 바라보는 사람.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늘의 태양과 인사를 나눈다. 이슬라 델 솔, 석양이 만든 붉은 발코니를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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