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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Soo Kim Oct 09. 2023

#7. 하늘과 맞닿은 무지개 땅

여섯 번째 정거장, 페루 비니쿤카(Vinicunca)


페루에 도착한 지 6일 차. 헐떡이던 숨소리가 조금 낮아지고, 걸음도 이전보다 편해진 걸 보니 멈췄던 내 몸의 항상성이 작동하기 시작한 듯했다. 몸의 리듬에 맞춰(?) 기꺼이 강행군을 받아들이겠노라 다짐하며 새벽부터 콜렉티보에 몸을 실었다. 일명 무지개 산Rainbow Mountain이라 불리는 비니쿤카Vinicunca는 쿠스코의 많은 여행사들이 자랑스럽게 내거는 페루의 대표 여행지다. 빨강, 노랑, 초록이 선명한 산등성이 사진은 '페루에 왔으면서 나를 안 보고 갈 순 없지'라며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잘 부탁드립니다!



고대하던 여행을 위해 여행자들은 작은 천막에 집결했다. 어설프게 만들어 놓은 작은 천막이었지만 몸을 파고드는 찬 공기를 피하기에 적당했고, 따뜻한 차 한잔은 긴장감으로 굳은 몸을 녹이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비니쿤카 트레킹은 고도가 높은 만큼 수행해야 하는 통과의례가 몇 가지 있다. 그러니 들뜬 여행자들의 몸과 마음을 한층 가라앉히는데 이 시간도 꼭 필요한 과정일 듯싶다.



텐트 밖으로 나오니 흩어져 있던 원주민들도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대표로 보이는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현지인들에게 뭐라고 소리쳤고, 이내 우리와 그들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일렬로 정렬했다. 해발고도 4,500m가 훌쩍 넘는 지대에서의 트레킹은 누구도 자만해서는 안 되는 여정이라 현지인과의 동행을 적극 추천한다. 뿐만 아니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안전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공식 투어업체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쿠스코에서 출발해 다시 쿠스코까지 돌아오는 당일 패키지를 선택했고, 옵션으로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편도코스를 추가했다. 도보로 왕복하겠다는 용감한 여행자도 간간이 보였다. 이렇게 1:1 매칭이 끝나고 잘 부탁한다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비니쿤카를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산길은 그 흔한 나무 한 그루 없이 확 트인 시야를 펼쳐 놓았다. 사람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한 원시의 풍경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이끼와 황토, 바위의 단조로운 자연 속에 시간이 할퀴고 간 흔적이 더해져 처연하기도 했다. 살짝 뛰어오르면 손에 잡힐 듯 몽글몽글한 구름만이 이곳이 얼마나 높은 고도인지 내게 일깨워주고 있다. 이젠 숨이 찬 것을 넘어 내 몸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몽롱한 느낌마저 든다.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돌담으로 예쁘장한 경계를 만들어 놓은 매표소에 도착했다. 입구는 페루 국기와 쿠스코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나뭇가지에 무심하게 꽂혀 있는 게 전부다. 2015년 발견 이후 쏟아지는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해 급조한 티가 여실했지만 상관없었다. 하늘과 맞닿은 무지갯빛 산을 찾아간다는 진귀한 경험 앞에 거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다시 행군의 시작. 분명 말을 타고 이동하는 패키지를 선택했는데 마부 아저씨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만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도보이동을 해야 했나 싶기도 했지만 이 생각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왕복 옵션이어야 했어... '라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으니 말이다. 



말안장에 올라타 둘러보는 풍경은 걸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더 이상 숨이 차지도, 몽롱하지도 않으니 시야가 100%는 더 넓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 만연설에 덮인 산도 눈에 들어오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들려왔다. 무엇보다 침식작용과 산화작용이 반복되며 만들어놓은 안데스 산맥의 비경 속으로 오롯이 빠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마지막 언덕을 앞두고 나를 내려놓은 가이드는 홀연히 떠나갔다. 지금부터 다가오는 시간은 온전히 나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무리를 따라 부유하듯 도착지점을 향해 걸었다. 


시간이 수놓은 무지개 산, 비니쿤카



완만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았던 마지막 언덕을 넘으며 광활한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무리가 개미만큼 작아 보인다.  



비니쿤카 혹은 위니쿤카Winikunka라 불리는 이곳은 케추아어로 '7가지 색의 산', 즉 '무지개 산(Rainbow mountain, Colorful mountain)'을 의미한다.  무려 24만 년 전, 나스카 지각판의 움직임으로 시작된 변화로 황토, 사암, 암염 등 다양한 광물이 퇴적층을 이루었고, 억겁의 시간 동안 산화된 광물은 그 성격에 따라 붉은색(철분), 흰색(탄산칼슘), 녹색(산화마그네슘), 핑크색(황토), 겨자색(유황) 등 14-15가지 색을 띠게 되었다. 차가운 바람과 습한 날씨는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선명한 천연의 테피스트리를 만드는데 한몫을 했다.



비니쿤카가 세상에 드러난 건 2015년. 오랜 세월 안데스 만연설에 덮여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눈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하면서 경이로운 맨얼굴이 드러났다. 기후 변화로 이 멋진 풍경을 보게 되었다니 안타깝긴 하지만 그야말로 선물 같은 풍경이다. 


비니쿤카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3월에서 11월 사이, 특히 6월에서 8월 사이가 가장 좋다. 남반구에 위치한 페루는 우리와 달리 4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는데 기온이 차갑고 바람이 많이 불긴 하지만 이때 보이는 하늘이 가장 화창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니쿤카에 있던 짧은 시간 동안 순식간에 구름이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싸락눈이 매섭게 내려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들기도 했으니 12월에서 2월 사이가 비수기임을 몸으로 체험한 셈이다. 눈앞에서 무지개 산이 사라지는 열악한 상황을 마주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성공이었다.



사진에서 보던 알록달록 오색창연한 무지갯빛(그런 사진은 대부분 보정판)은 아니었지만 자연이 만든 풍경 앞에 서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 멀리 보이는 만연설, 구름과 함께 어우러진 총천연색의 땅, 그리고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신성한 기운은 혼연일체가 되어 비니쿤카를 신비롭게 만든다. 해발 5,200m 대자연과의 만남, 아마도 세상 끝날까지 기억할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비니쿤카 주변에는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라마, 알파카, 비쿠나 등의 동물을 키우며 생계를 유지한다. 과거엔 이곳의 얼음을 캐내어 알파카나 라마에 싣고 쿠스코에 내다 팔았고, 지금은 비니쿤카를 찾는 여행자들을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새로운 경제 시스템도 함께 들어오는 법, 여행산업이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먹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초원 위 어설프게 지어놓은 건물, 간판은 없지만 작은 선반에 올려진 잉카콜라와 각종 음료들이 비니쿤카 판 슈퍼임을 증명한다. 그곳엔 어른은 없고, 아주 앳된 소녀 둘이 커다란 눈으로 이방인을 바라본다. 행여 놀랄까 싶어 얼굴에 웃음을 장착했더니 소녀들도 마주하며 웃음을 지어준다. 우리의 웃음에는 이런 의미들이 담겨있겠지.


"안녕! 여기 너희가 집이니?"

"네, 우린 여기 살고 있어요."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미안해. ... 그런데 혹시, 내가 너의 세상에 잠시 머물러도 될까?"

"들어오는 건 아무 상관없어요. 여긴 여행자들을 위해 열어놓은 곳이니까요."

"고마워!"

"대신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의 값어치를 지불해야 해요."

"그래, 내게 필요한 것이 있는지 한번 둘러볼게."


물음도, 대답도 없는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끝맺는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문득 화장실이 생각났다. 어떻게 화장실을 그녀들에게 설명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약간의 값을 치르고 그들의 신식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내게 화장지 3칸을 건네며 화장실을 내어 주었다. 화장실은 껍데기만 변기였지, 모든 시스템은 100% 수동으로 제어해야 했다. 부끄럽고 미안하게도 뒤처리는 자매의 몫, 너무도 잘 훈련된 직원처럼 각자의 역할을 하고, 금세 초원의 아이가 되어 들판을 내달린다.



발견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비니쿤카는 새로운 관광지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가는 듯하다. 여전히 험난한 길이지만 새롭게 길도 만들고, 여행자들이 묵을 롯지도 생기고, 투어의 중류도 다채로워지고 있다. 그렇게 신비로운 산은 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비니쿤카 여행


비니쿤카는 쿠스코에서 짧게는 당일치기 여행(100km 정도 떨어져 편도 3시간 정도 걸림)도 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비니쿤카 주변을 함께 둘러보고 싶다면 1박 2일, 2박 3일의 여유로운 투어도 선택할 수 있다. 푸른 하늘과 선명한 무지갯빛을 보고 싶다면 건기인 6-8월의 여행을 추천한다.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현지 여행사(안전하고 공인된 여행사 선택이 중요)를 통해 교통을 포함한 모든 여정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다만 고도가 5,200m나 되기에 안전을 위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 변덕스러운 날씨로 하루에도 4계절을 모두 체험할 수 있는 만큼 따뜻한 옷과 우의, 선글라스는 필수이다.

  - 높은 고도로 인한 고산병의 위험이 있으니 쿠스코에서 최소 3-4일 정도의 적응기간을 거친 후 방문하는 것이 좋다. 물과 코카잎은 필수 휴대품이며 가벼운 식사와 금주는 도움 된다.

  - 빨리 걷기보다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걷고, 짐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힘들 경우 말을 타고 이동할 수도 있다.



안녕을 고하며



비니쿤카에 다녀온 후 다음 날 하루는 온전히 '쉼의 날'로 선택했다. 늦은 아침 일어나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갔다. 아무리 걸어도 더 이상 숨이 차지 않는 것을 보니 내 몸도 쿠스코에 적응되어가나 보다. 친해질 만하면 떠나야 하는 것, 여행자의 당연한 숙명이지만 조금은 아쉬움이 묻어나기도 한다.



하나하나 모두 눈에 담아 갈 것처럼 쿠스코 시내를 둘러본다. 미처 들어가 보지 못했던 쿠스코 대성당에 들어가 짧은 기도도 남기고, 그간 고도에 적응한다며 멀리했던 맥주도 한 잔 들이켰다. 짧았지만 모든 것이 좋았던 여행,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더 애잔하게 다가오는 시간들... 맥주거품과 함께 삼키며 찬란한 도시와 인사를 나눈다. 쿠스코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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