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짙은 파란색으로 물든 하늘 아래, 버스가 달려간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라 버스 안은 깜깜했고 사람들은 곤히 잠들어있다.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왠지 잠이 오지는 않았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보려 몸을 앞으로, 옆으로 엎치락뒤치락하니 깨어있던 영락이가 말을 건넨다.
영락: '왜? 잠이 안 와?'
상진: '아으.. 그러게 잠이 안 오네. 그런데 왜 우리는 매번 새벽에 이동하는 거야. 피곤해 죽겠네.'
내가 투털 거리자 영락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얘기한다.
영락: '여행 일정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지 뭐. 둘러볼 곳은 많은데 몇 달이나 여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의자와 내내 씨름을 하는 동안 푸노에 도착했다. 푸노(Puno)는 페루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푸노 주의 주도이다. 푸노 시는 1668년 스페인의 정복 후에 건설된 도시로 티티카카 호에 위치하고 있다. 호수 주변은 잉카시대 때부터 문명의 번창한 지역이었으며 안데스 산맥의 거의 중앙에 있는 약 3,850m 높이의 도시이다. 볼리비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엄청나게 넓은 티티카카 호수를 따라 도로를 달리다 보면 볼리비아로 넘어갈 수 있다.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의 대합실에 자리 잡고 앉았다. 여전히 날은 어두웠고 미리 예약해둔 우로스 투어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영호는 이미 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기대앉았고 영락이는 터미널을 둘러보고 온다고 하고는 휙 가버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 여행하며 그림 그리던 스케치북을 꺼내 들고는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행하며 틈틈이 그리던 그림들과 일기들은 이제 내게는 중요한 일과이자 여행의 기록이 되었다. 내가 경험하고 느낀 순간들을 내 손과 스케치북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여정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은 직업상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일로서 여행을 한다면 제대로 느낄 수 없으니 대기시간이나 여유가 생길 때에만 작업을 한다.
내가 스케치북을 정리하는 사이 하늘은 밝아지고 노란빛을 머금은 햇살이 창밖에서 쏟아졌다.
'후우.. 이제 아침이네.'
터미널을 둘러본다고 갔던 영락이가 돌아왔다. 영락이는 자판기에서 뽑아왔는지 캔커피를 건네었다.
상진: '고마워. 잘 마실게.'
영락: '그래. 이제 곧 선착장까지 가는 버스가 올 테니까 슬슬 준비하자.'
20분 정도가 더 지나자 선착장까지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영호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 한 얼굴로 짐을 챙겼다. 우리는 다시 버스에 탔다.
페루에서 비행기와 기차, 버스를 타고 여행하고 있지만, 단연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많다. 한 번 이동할 때마다 5~6시간은 기본이니 어느새 버스여행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시간 버스를 타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든다. 그래도 새로운 세상을 보고 느끼려 그 먼길을 달려간다.
선착장이 있는 정거장에 내려 탑승할 배까지 걸어왔다. 티티카카 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를 걸쳐 있는 아주 넓은 호수이기 때문에 보트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우로스 섬까지 가게 된다.
보트는 곧 티티카카 호수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티티카카 호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이다. 예전부터 티티카카 호수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어서였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여행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 것도 있었지만 내게 티티카카의 꿈을 심어준 것은 바로 '박노해 시인'이었다.
박노해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군부 독재에 맞선 민주투사이자 혁명가이며, 또 여행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과 시, 그리고 글귀들로 사진전을 종종 열고는 하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전시가 티티카카 호수에서 원주민들의 삶을 취재하고 촬영한 사진들이었다. 원색적이면서도 강렬한 색감들, 아름답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는 그들의 표정과 일상의 모습들을 공감과 감성적으로 풀어주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내가 티티카카 호수에 대해 환상을 갖게 된 것은.
우리는 보트로 호수의 주변을 둘러보며 우로스 섬으로 출발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빛을 내는 티티카카 호수의 모습은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 갈대 역시 빛을 받아 더욱 노랗게 물들었고 뒤로 보이는 고산의 풍경들은 푸노가 얼마나 환상적인 곳인지 알게 해 준다. 황홀한 경치를 넋을 놓고 보는 동안 배는 우로스 섬에 도착했다. 우로스 섬은 사실 섬이라고 하기보다는 거대한 부유물에 가깝다. 진흙과 '토토라'라고 부르는 갈대를 엮어 지반을 만들고 그 위에 갈대로 만든 움막과 조형물들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실제로 이 곳에서 생활을 한다. 물 위를 떠다니는 인공섬이기에 농사 같은 것들은 경작할 수가 없고, 대부분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배를 통해 들여오며 수익은 관광사업을 통해서 얻는다.
배에서 내려 섬에 발을 내딛자, 촌장을 비롯해 마을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일렬로 서서 환영을 해준다. 환영 인사를 하고 촌장이 여행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사이, 마을의 아낙들은 움막에서 직접 손으로 만든 제품들을 들고 나와 노점을 펼친다. 촌장은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우로스 섬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손수 시범을 보이며 건축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촌장이 이야기하면 가이드가 영어로 통역해주는 형식으로 진행을 한다.
촌장의 시범을 보면서 사람들은 우로스의 건축에 대해 흥미를 보이고 놀라워했고, 설명이 끝나자 움막이나 섬의 곳곳을 소개하며 노점으로 데리고 와 구경을 시켜주었다. 마을의 여자들은 대부분 노점에서 물건들을 팔기 위해 적극적으로 영업을 했는데, 나도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 작은 열쇠고리와 파우치를 골랐다.
사실, 배를 타고 호수 위를 돌면서 가이드분이 미리 귀띔을 해준 말이 있었다. 우로스 섬의 주민들은 관광사업을 통해서만 수익을 얻기 때문에 그들의 호객행위에 대해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이드는 여행자의 기분을 충분히 고려해서 해준 이야기였고, 나는 그 배려가 고마웠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 상업적으로 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의 삶과 환경이 그러하고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보고 느끼러 오는 손님들이니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는 다른 나라나 지역의 문화와 삶을 체험하려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노점을 둘러보는 사이, 몇 명은 관광용 보트를 타고 섬의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고, 나는 잠시 쉬며 의자에 앉아 주민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봤다. 남자들은 식량조달이나 건축 등 거 친일 들을 하고 마을의 여자들과 아이들은 관광객을 응대하며 물건들을 만들고 정리를 했다. 그들은 원색으로 된 옷들을 입고,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잔업들을 한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척박한 환경 속의 삶인데도 어느 누구 하나 고된 노동자의 얼굴을 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웃으면서 떠들썩하게 대화하고, 장난도 치는 모습에서 긍정적이고 유쾌한 모습들이 보인다. 그들의 삶과 빗대어 볼 때 훨씬 더 좋은 환경 속에서 불평불만을 토로하던 내 모습들이 부끄러워졌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척박한 환경 속에서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 역시 푸노의 대자연이 주는 영향이었을까. 그들의 마음을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살, 황홀한 석양이 위로해 주고 대자연이 그들에게 긍정적이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우로스 투어는 다른 투어들과는 달리 레저스포츠도 없고, 화려하거나 낭만적이지도 않다. 유럽의 건축물만큼 웅장하지도, 정교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광활한 티티카카 호수 위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통해 문화를 배우고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배우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나쳐오면서 교류를 하지만, 정작 손 안의 디지털 세상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오히려 직접 만나서 교감을 나누는 것보다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빌딩 숲 안의 디지털 세상보다는 더 아름답고 사실적인 세상이 그리워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삶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닫게 해 준다.
페루 여행이 그렇다. 페루의 대자연을 통해 그동안 살면서 그냥 지나치거나 놓치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고 지고 아이들이 자라는 순간들을. 그리고 감사함과 삶에 대한 자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일깨우게 해 준다.
내게 여행은 '새로운 모험이자 도전, 배움과 깨달음'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내가 현재를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남미에 온 것이다. 그동안 지나왔던 페루 여행으로 나는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삶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배우게 되었다. 역시 여행은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