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 뻔한 날의 단단한 위로
구시대적인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역할이라는 믿음을 완전히 놓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난임의 시간을 걷는 내게 더 큰 짐이 되었다.
남편은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을 역할을 다한다.
그에 비해 나는, 아내로서
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맞벌이니까,
경제활동으로 내 몫을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봤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만약 시험관 시술로 인해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그리고 임신까지 되지 않는다면?"
그 질문이 또 다른 불안을 끌고 왔다.
직업도 없고 아이도 없는 내가,
무엇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남들이 보는 시선에 내 존재를 맞추던 습관,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 있는 존재처럼 여겨왔던 나
그 모든 조건들이 사라졌을 때, 나는 누구인가
난임의 시간은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일을 하지 않아도, 임신을 하지 않아도
그저 나라는 존재만으로도 괜찮다는 말.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는 이 명제를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나의 무가치함을 말하면 눈시울을 붉히는 나를
남편이 조용히 안아주며 말했다.
"그 시간도, 당신도 의미 있어.
아이를 갖기 전에
당신이 당신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일 거야."
그 말은 내 마음을 조용히 다독였다.
생명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나를 잃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다시 만나는 시간일 수 있다는 믿음
이 확신은,
나를 겁먹게 하던 피로와 두려움을 조금씩 밀어냈다.
내가 나의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언젠가 만나게 될 아이에게도,
온전한 가치를 심어줄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감사하다.
내게 이 시간을 허락해 준 남편에게,
그리고 이 시간을 견디는 지금의 나 자신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