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빈혈 증상이 도지면서 주식 차트로 치면 ‘역대급 저점’에서 한 주를 출발했습니다. 금요일쯤엔 서서히 반등에 성공했지요.
폭우가 쏟아지던 금요일 퇴근길에는, 미야자와 겐지의 시 제목('비에도 지지 않고')처럼 비에 젖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경지를 떠올렸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방구석 비 맞기’를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우산 대신 책장을 펼치고, 빗방울 대신 활자를 맞는 방식으로요. 활자가 후드득 떨어져 마음을 적셔주길 기대해 보았습니다. (* 어떤 소설이 비 오는 날에 좋은지에 대한 고민도 즐겁게 하였습니다. 손창섭의 '비 오는 날', 김애란의 '물속의 골리앗', 레이 브래드버리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윤흥길 '장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라쇼몽'... 여러 비 오는 소설을 떠올리며 퇴근을 하였지요.)
컨디션과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출렁이는 걸 보면,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나?’ 싶은 생각이 스치기도 합니다.
어느덧 2025년 6월도 2/3가 지난 토요일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아침에 동네 독서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달 모임책은 체코의 국민 작가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과 『정원가의 열두 달』이었습니다. 카렐 차페크에 관한 언급이 편지에 벌써 세 번째 이어지네요. 그만큼 그의 책을 오래 붙들고 있었거나, 유난히 긴 여운을 남긴 작품인가 봅니다. 그리고 이 책들을 읽는 과정에서 ‘매주 독서 편지를 써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으니, 내용의 재미를 넘어 제 삶에서 오래 기억될 책이 되었습니다.
『정원가의 열두 달』은 정원을 가꾸는 작가의 사계절 일기입니다.
위트 넘치는 문장이 가득해서, 읽다 보면 어느새 혼자 피식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책을 들고 모임에 가는 길, 창밖을 보며 문득 ‘우리에게도 뼛속 깊이 새겨진 정원 가꾸는 문화가 있었다면, 지금 도시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인생』,
철도 공무원으로 살아온 주인공이 은퇴 후 자신의 삶을 자서전 형식으로 써 내려갑니다.
겉보기에 단조롭고 성실하기만 한 삶 같지만, 그 속에는 예술에 대한 열망, 어딘가 미심쩍은 사랑, 직업 세계의 부조리와 타협이 소용돌이칩니다. ‘평범하다’고 부르는 인생이 사실은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 층위로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34장은 독서 모임 회원 모두가 ‘몇 번이고 다시 펼쳐 보고 싶다’는 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타인의 삶은 언제나 내게도 가능했을지 모를 또 다른 삶이라는 것.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타인과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나’를 알아가게 된다는 것. 이 발견을 통해 세상은 넓어지고, 평범한 삶은 찬란한 삶으로 빛난다는 것.
그리고 이 발견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확장되는 것이며, 이 세상이 찬란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삶이야 말로 평범한 삶이며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한 회원님은 김영하 작가님의 『단 한 번의 삶』의 뒤표지에 실린 문장을 인용하며 깊이 통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그 구절을 듣자, 저는 대학 새내기 시절 시창작 동아리에서 썼던 '퍼즐놀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갓 스무 살이던 저는 '나는 내 조각이 아니라, 타인들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푹 빠져 있었거든요. 그 시절엔 막연한 직관이었는데, 이제는 카렐 차페크, 김영하 작가님의 유려한 문장으로 그 생각을 만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카렐 차페크가 제 또래 즈음에 쓴 작품이더군요. 그래서인지 죽음을 앞둔 주인공의 회상이 조금 더 농익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문학은 여러 변주가 존재하니, 언젠가 이 소설보다 더 원숙한 작품을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요.
제가 나이 들어 이 소설을 혹은 다른 변주의 작품을 읽게 된다면(그때에도 시력이 허락한다면^^), 그즈음엔 『평범한 인생 2.0』을 쓸 수 있을까요? 업그레이드라기보다는 패치워크처럼 말이지요.
이번 주 토요일 오후도, 제 편지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마가 시작되었네요.
하지만 빗방울도 모이면 강이 되듯, 우리의 평범한 날들도 모여 특별한 인생이 되겠지요.
이번 주도 그 믿음으로 가볍게 걸어가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