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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7 책편지] 타자의 문장, 나의 하루

by 겨울아이 환

“금요일 낮, 커피 한 잔이 내 하루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평일의 여유가 뜻밖의 선물처럼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제 편지를 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제는 금요일, 집 근처 카페에서 낮 시간을 보냈습니다. 평일 낮의 여유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특별한 순간입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신 것뿐인데도 그 소소한 시간이 일상 속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습니다.

2025년 현충일 연휴,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아침에 냉동실에 아껴 두었던 에그타르트와 첫 커피를 함께하며,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 『나의 나무 아래서』 읽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작년 가을, 그의 마지막 소설집 『만년양식집』을 읽다가 난해함에 중단한 뒤, 다른 작품을 접해보고자 선택한 책입니다.


책을 읽으며 처음 든 인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분도 일본인이구나.' 였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두 작가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자신의 유년기를 다루며, 일본인 중에서도 가장 양심적인 시선으로 그 전쟁을 바라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타자의 문장'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그들이 일본인으로서 경험한 전쟁과 제가 한국인으로서 바라본 역사의 결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들의 글을 '타자의 문장'으로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가 있는 아들 히카리의 교육을 이야기하며, 다양한 교육 관련 주제를 친근하게 풀어냅니다.

독서에 대한 그의 관점에서 특히 공감할 부분이 많았으며, 학교에 대한 시선과 독서 습관이 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나의 방향이 틀리지는 않았다' 라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권위에 저도 모르게 매료된 걸까요?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과의 연결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다니며, 어린 시절 단풍나무 위의 작은 나무집에서 책을 읽던 경험이 어른이 되어 전철이라는 공간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어려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읽으려고 결심한 저자의 이름과 책 제목을 공책에 적어두었다가 몇 년이 지나서 그 책을 읽어보고 좋은 책이란 것을 확인하게 되면 기쁘다는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기 위해 서두르기보다는 적당한 이해의 때를 기다리는 예비 독서를 강조한 부분엔 밑줄을 그었습니다.


p.23지금 히카리에게 음악은 자신의 내면 깊은 감정을 확인하고, 타인과 공유하며, 사회와 연결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언어입니다. 이는 가정에서 시작되어 학교생활을 통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모국어뿐 아니라 과학, 산수, 체조, 음악 모두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입니다. 외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p.123~124지금 나에게 책을 읽는 나무의 집을 대신하는 곳은 전철입니다.


p.166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실제로 그 책을 읽어보고 생각했던 대로 좋은 책임을 확인하게 되면 그저 즐겁기만 합니다. 야구에 저스트 미트(일본식 영어로, 야구에서 볼을 배트의 한가운데에 맞히는 일, 꼭 맞는 일을 뜻한다/역주)라는 말이 있지요? 책과 그것을 읽는 나의 저스트 미트라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여러분이 어떤 책과 저스트 미트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읽기를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계속 잊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그 책을 향해 타석에 들어서십시오.


이 에세이에는 또 독특한 점이 있는데요,

이야기 흐름 속에 갑자기 글쓰기 강좌 같은 단락이 등장하고,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내용을 엮은 글이라서인가 봅니다.


점심 무렵, 집 근처 카페에서는 자주 쓰는 노란 노트에 이 글의 초안을 적었고, 최근 가입한 민음북클럽에서 보내준 『잡동산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여러 글을 발췌해 엮은 책인데, 첫 글이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었습니다.

매우 유명한 작품이지만, 사실 일본 소설은 많이 읽지 않았어요. 요즘 이것저것 알아보겠다고 열을 올리고 있지만 늘 책이 밀려 있네요.

비록 발췌본이지만 흥미로웠습니다. 도련님 캐릭터가 참 매력적인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저는 자꾸 도련님을 추켜세우는 '할멈'이라는 인물에게 마음이 가더군요.

얼마 전 영화 『듄2』을 볼 때도 주인공 폴보다 엄마인 제시카에게 더 마음이 쓰였답니다.


오늘 읽은 두 책 사이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표지가 초록색이라는 것.

외출 전 가방에 넣을 책을 고를 때 손이 가는 책들이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초록색 표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후보에 올랐던 책은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 수업 점검을 겸해 읽고 있는 『독서교육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임선우 작가의 『빛이 나지 않아요』입니다.

특별한 관련성도 의도도 보이지 않지요.


색채 심리학에 따르면 초록색은 균형과 조화를 상징하지만, 때로는 침체와 무료함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합니다. 영감이 부족할 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색이기도 하고요.

요즘 저는 먼 출근길과 유난히 소란스러운 학년을 맡은 탓인지, 에너지가 자꾸 고갈되는 느낌입니다.

하루를 마치고 나면 바닥까지 무너졌다가, 아침이 되면 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끌어올려 하루를 시작하죠.

그러다 문득, 아침에 읽은 초록색 표지 에세이의 한 챕터가 지닌 완결성처럼 나 역시 하루하루를 온전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는 걸 자주 깨닫습니다.

쉽게 지치지만 회복과 완결을 갈망하는 제 무의식이 초록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초록은 균형, 회복을 의미하고, 조용한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어쩌면 지치지만 살아야겠다는 마음에서였을지 모릅니다.

스스로조차 명확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추측입니다. 제 마음을 이렇게 요약해 봅니다.


'나는 요즘, 하루를 버티는 일이 글을 쓰는 일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글을 쓴다.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구독자님께서는 요즘 어떤 색에 끌리시나요? 그 색이 당신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글이 구독자님의 하루에 힘이 될지, 혹은 불편함을 줄지 알 수 없지만,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박한 글이지만, 매주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토요일 아침,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안한 연휴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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