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첫 눈
<SF 단편 컬렉션 순간의 좌표〉
연재를 시작합니다.
영원 : 15분. 사랑 : AI. 유토피아 : 디스토피아…
시간과 기억의 경계를 탐험하는 8편의 이야기.
일부는 재수록이지만,
하나의 좌표로 엮었습니다.
당신만의 바로 그 순간을 발견하시길.
매주 새로운 좌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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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조직에서는 나를 ‘엠마’라고 부른다.
서울 한복판, 아직 입주도 시작되지 않은 어둠뿐인 신축빌딩에서 신참 제임스와 작전 중이었다.
탕—
총성이 어둠을 갈랐다. 총알은 내 옆을 스치고 뒤쪽 콘크리트 기둥에 박혔다. 짧고 거친 접전 끝에, 내가 그의 급소를 가격하며 상황이 정리됐다. 손이 총으로 개조된 사이안이었지만, 내 앞에서는 쓸 틈도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그가 아니라, 그가 들고 있던 가방이었다.
“역시 레전드십니다. 저도 좀 끼워주시지.”
어둠에 숨어 있던 제임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이안 정보가 누락되면 화부터 낼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싱글벙글이다.
“첫눈입니다!”
정말, 하얀 눈발이 밤하늘을 가르며 흩날리고 있었다.
“젊어서 좋군. 어린애처럼 눈 보고 좋아하고.”
“오늘 소개팅 잘 될 것 같아요. 선배도 약속 있으세요? 눈도 오는데.”
“약속? 있지.”
말 많은 제임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제임스가 떠드는 사이, 쓰러져 있던 사람이 꿈틀거리더니 총을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정적이 내리고, 피 냄새가 퍼졌다.
“세상에… 방금 제 다리 사이로 지나간 거 맞아요?”
하얗게 질린 제임스가 찢어진 바짓가랑이를 가리켰다.
나는 대답 대신, 바닥에 나뒹구는 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왼손을 총으로 개조한 사이보그였다.
“요즘은 개나 소나 사이보그네요.”
분한 듯 그는 총을 멀리 걷어찼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냐.”
시간을 확인했다. 19시 5분.
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처리반이 오면 가방과 현장을 넘기고 철수하라고.
목표 대상이 누구인지는, 늘 직전까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영화 속 화려한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이 대의와 기술로 종횡무진 활약할 때—
옆에서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엑스트라에 가깝다.
물론, 나는 그렇게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첩보 경력 25년.
이 판에서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진 않다.
지난 작전 때는 아차 하는 순간 3층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낙법을 배운 게 다행이었다.
처리반은 눈 때문에 도착이 30분 지연됐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충성을 맹세하는 제임스에게 말했다.
“현장은 내가 지킬 테니 먼저 가. 옷이나 갈아입고 가야지.”
제임스가 떠나자, 틀어올렸던 머리끈을 풀었다.
숱 많은 곱슬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리자, 긴장도 조금 가라앉았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퍼지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눈발 사이로 어른거렸다.
“첫눈이네… 너도 어딘가에서 이 눈을 보고 있니?”
내 딸은 스물여덟.
아마 제임스처럼 데이트라도 하고 있겠지.
“날이 추워졌어.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언제나 목을 감싸고. 감기 조심하고.”
오늘도, 나는 딸에게 보이스 메일을 남긴다.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아기는
상자에 내려놓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쳤다.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추운 겨울인데 아무도 데려가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되었지만,
그럴수록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그날 알았다. 내가 아주 잘 뛴다는 것을.
그날도,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버려진 아기에 대한 사고 뉴스는 없었다.
너무 어렸다.
그 날 이후 시간을 알지 못했다.
그 아이를 만난 건 산 속에 있는 스파르타 기숙학원이었다. 재혼한 엄마는 나와 전쟁을 몇 번 치르더니 한창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나를 그곳에 보내버렸다. 엄마에겐 나보다 열 살 어린 남동생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자야하는 단체생활이었지만, 차라리 그곳이 마음 편했다.
한 주가 지나자 누군가 자습실 내 책상위에 매일 우유를 놓아두기 시작했다.
뭐야, 나보고 키 좀 더 크라는 건가?
친구들은 그 누군가를 쑥쑥이 아빠라고 불렀다. 나는 교실 뒤편에 숨어 기다리다 우유를 놓고 가는 그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공부를 잘했고 키가 컸고 사투리가 심했다.
“넌 목소리가 재즈 가수 같다. 꿈꾸듯 몽환적이야.”
판사가 꿈이라는 그 아이는 내 목소리가 듣기 좋다며 자꾸만 말을 시켰다. 그전까지는 남자 같은 내 목소리가 창피했는데 몽환적이라는 고급스런 표현을 써서 칭찬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윈터스쿨 마지막 날, 그 아이가 선물을 주었다. 검정색 볼펜인데 허리를 돌리면 녹음이 되고 꼭지를 누르면 소리가 재생되었다. 맨 앞에는 그 아이의 수줍어하는 숨소리와 함께 수줍어하는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너를 좋아해. 너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었어.”
그날, 우리는 같이 밤을 보냈다.
똑똑하고, 박력 있고, 무엇보다 나를 많이 좋아했던 그 애가 싫지 않았다. 헤어지면 다시 못 볼 거란 생각이 우리를 애틋하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정말로 우리는 그 후로 다시 만난 적이 없다.
내가 아기를 가졌다는 걸 안 건 기말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늦가을 한동안 소화가 안 되고 속도 안 좋았는데, 알고 보니 입덧이었다. 그 아이와는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았다. 알았다 한들 열일곱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엄마는 나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겠다며 조기유학 보낸 남동생 뒷바라지를 한다고 호주에 건너가 버렸다. 새 아빠? 그는 원래 내게 무관심했다. 조만간 그들과 합류할 거라며 국내 생활을 정리 중이었다.
며칠을 두려움에 떨면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해결하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세상에서 지우려고 했다.
그땐 나도 꿈같은 것이 있었다. 그 꿈이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겨울방학 특강 학원비를 모아 낙태를 해준다는 병원을 찾아갔다.
모니터 속 웅크리고 있던 태아가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있었다.
나는 마취가 덜 깬 상태로 도망쳐 나왔다. 아무도 모르게 아기를 낳을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 시절 나는 사고뭉치에 겁쟁이였지만, 그날 도망친 것만큼은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결정이었다.
걷다가 딸 또래 여자를 보면 눈길이 갔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양 갈래 머리의 아이, 노란 가방을 맨 유치원생, 양 갈래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교복 입은 여학생, 늦은 밤 편의점에서 일하는 분홍머리 아르바이트생, 한 몸인 듯 꼭 붙어 다니는 젊은 연인,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젊은 여자를 보면 걸음을 멈춘다.
헤어진 지 28년 하고도 201일.
“지금 넌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니? 널 만나면 바로 알아볼 텐데.”
딸에게 보이스 메일을 남기면 외롭지 않았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유진
투자 심사 후보 중, 신기한 제품이 올라왔다. 시냅스에 있는 기억 엔그램을 연결해 이미지화를 넘어 실제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 오감을 생생하게 느끼고 감각하게 해주는 제품이다. 엔그램의 CPEB3 단백질을 단기적으로 활성화시켜 느낌과 감각에 대한 기억도 환기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네이쳐에 발표된 지 일 년 밖에 안 지났다.
제품은 엔그램이 뇌뿐만 아니라 심장, 주요 장기들에도 분포되어 있다는 것에 착안했다. 기억들을 실제 감각할 수 있다니, 이게 실제라면 사업 가능성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한편 이건 사기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 팀원들에게 올라온 1차 검토 보고는 칭찬 일색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벅찬 감동으로 보고서를 써낸 친구도 있었고, 보고서를 제출하고 휴가를 내버린 친구도 있었다. 이구동성으로 대단한 제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젠 내가 냉철해져야 할 시간이다. 체크!
대표와 투자자들을 설득하려면 뭔가 더 필요했다. 바로 나의 확신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A Land의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퇴근하고 없었다. 하긴 금요일 늦은 시간이다. 그러나 제품 성능이 궁금한 채로 이틀이나 보낼 수가 없었다.
가능한 가장 빠르고 편한 시간에 제품 시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더니, 한 시간 뒤라고 답이 왔다.
신속했다. 체크.
“A Land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필입니다.”
“유진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는 칼텍에서 생화학과 의공학을 전공한 박사였고. 어메이징 존을 다니다 나와 A Land를 차렸다. 경력만 봐서는 신뢰할 만하지만 진부한 스펙이었다. 예외라면 프로필 사진보다 해말간 외모였다.
체크. 사진을 교체하라고 해야겠군. 하이힐을 신은 내가 그 남자의 어깨에 닿을 정도이니 키는 180Cm 이상일 것이고.
“에이 랜드는 회사 이름인가요? 설마 어메이징 이니셜은 아니죠?”
“A면 안되나요? B나 C보다는 좋잖아요.”
그건 그렇지,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실은 개발 서버명이 아폴로였어요. 그대로 이어진 거죠. 하지만 좋은 질문입니다. 생각해봐야겠어요.”
솔직하고 유연한 답이었다.
체크. 대표의 중요한 덕목이지.
“바로 시작하죠. 전 체험을 하려고 왔습니다.”
제품소개 자료를 꺼내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그럴싸한 기술의 작동원리나 알고리즘보다는 직접 체험해보는 것이 최고의 테스트다.
“이사님, 듣던 대로 단도직입적이시네요. 그럼 설명과 질의응답은 테스트를 끝내고 하겠습니다.”
스마트 웨어러블을 장착하는 절차가 복잡했다.
투피스 잠수복 같은 옷은 뻑뻑하고 거추장스러웠다. 체크.
옆방에서 힘들게 갈아입고 오니, 그도 똑같은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A Land의 장점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거운 홀로렌즈가 달린 헬멧을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는 중앙에 있는 두 개의 긴 안락의자에 나란히 누웠다.
“이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 내겐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없어요."
"…"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럼 편안하게 가만히 누워있으라고 했다.
A Land는 기억이 충분히 강렬하기만 하다면, 내가 기억하는, 모든 감각이 가장 열려있는 바로 그 순간을 찾아내 재현해낼 거라며.
불편했다.
재현할 그 순간이 언제인지 내가 결정하지도 못한 채 체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체크.
불만스럽게 누워있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보드라웠다.
어?
말랑말랑했고, 따뜻한 느낌의 정체는 누군가의 뺨이었다.
그 뺨은 이내 멀어지고 이번에는 뾰족한 코가 내 얼굴에 다가왔다. 차가웠지만, 비벼대는 느낌은 간지러웠다.
잠깐 허공을 날다가 푹신한 곳에 안착했다.
쿵쾅쿵쾅.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고, 몰캉하고 따뜻했다. 좋은 냄새가 났다. 달콤한 향이 실크 스카프처럼 부드럽게 감쌌다. 우유 냄새와 상큼한 레몬향도 지나갔다.
그리고 눈동자가 마주쳤다. 끝없이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초점이 맞지 않고 흐릿했다.
그만 울어. 얼굴을 보고 싶어.
이번에는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딸기 맛이 났다.
나는 깨달았다.
촉각, 후각, 시각, 청각, 이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끼고 있는 것은 나였다.
나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잃어버린 얼굴을.
내 뺨 위에 뜨거운 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어둡고 깊고 차가운 어딘가로 낙하했고, 등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낯설어.
내가 울기 시작하자 그녀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눈 맞춤을 했다.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환하게 웃었다.
미소가 예뻤다.
“행복해야 해. 아가.”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했고, 나는 다시 쑥 아래로 내려갔다.
차가운 것이 내 위에 떨어졌다. 하나. 둘...눈이었다.
순간, 빛이 사라졌다.
쾅!
깜깜해졌다.
무섭다. 혼자 남았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두 손, 두 발을 버둥대며 울었다.
가지마.
엄마. 엄마. 엄마!
번쩍 눈을 떴다. 정필 대표가 얼굴에 눈물범벅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의 얼굴도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내가 경험했던 것, 감각했던 것을 그도 고스란히 경험했던 것이다.
이 남자, 공감능력이 뛰어나구나.
아냐, 이럴 때가 아니야.
초면인데 펑펑 울어버린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던 나의 개인사까지 고스란히 들켜버렸잖아.
제품 시연을 요구했던 나의 경솔함에 화가 나고 창피했다. 나는 초고속으로 감정을 추슬렀고, 당장에라도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는 내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가 데려간 바는 따뜻한 동굴 같은 곳이었다.
나는 어두운 곳을 유난히 싫어했지만, 그곳은 적당히 어두워 오히려 좋았다.
그는 방금 전 들여다 본 내 탄생의 비밀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체크.
우리는 A Land에 적용된 기술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말은 짧았지만 대화는 잘 통했고 밤이 깊어갈수록 서로에게 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