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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순간

2화 SF Land

by Stardust

엠마


시력이 나빴던 제임스가 특수 안구를 넣는 수술을 받았다.

나는 몸보신에 좋다는 전복죽을 사들고 병실로 갔다.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누운 제임스는 앞이 안 보여도 냄새만으로 맛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건 수술도 아니에요. 그냥 시술이죠.”

백 미터 밖 개미 앞다리도 보일 거라며 잔뜩 들떠 있었다.


신체 강화 수술은 원래 장기 손상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시력, 근력, 폐활량 같은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반인들이 더 많이 받는다.

강담대로에는 성형외과 대신 신체 강화 병원이 가득하고,

패션 디자이너들은 강화된 몸에 맞춘 옷을 앞다투어 내놓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이안이라 불렀다.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의 경계를 걷는 존재.

부유층과 특수 직종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가격이 비싸, 사이안은 어느새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되었다.

요즘 경찰이나 소방대원들도 강화수술은 로망이다.

우리는 기계가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밀려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걸까.


“선배도 이번 기회에 지난번 다친 어깨 바꾸시죠. 직원 할부도 된다던데.”


국가 공무를 수행하다가 부상을 입은 특수직 공무원에게는 나라에서 강화수술비용을 지원해 주는 ‘디지털 5.0’ 제도가 있다.

지난해 어깨를 더 심하게 다쳤다면, 지금쯤 기계 어깨를 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회복이 너무 빨랐다. 그 바람에 지원 대상에서 떨어졌다고 들었다.

성능 좋은 요원은 많고, 직급도 나이도 애매한 구닥다리 여자요원에게 이 조직이 투자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아직 여기에 있는 이유는, 이 조직이 사람을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가출했다가 제 발로 집에 들어온 내게,

어머니는 공부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되라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라.

세상이 급변할 때는 나랏일 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

우습게도 그 잔소리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할부까지 해가며 몸을 바꿀 생각은 없다. 십 년 전 아파트를 사느라 받은 대출도 아직 이 년이나 남아 있다.

“멀쩡한 몸에 금속이나 칩 따위를 집어넣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칙해.”


“아참, 왜 그렇게 노인네 같은 말씀을 하세요?”


“제임스, 퇴원하면 그 좋아진 눈으로 공부나 열심히 해. 시험 한 달도 안 남았잖아.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진급하려면 시험은 통과해야지.”


제임스는 남은 국물을 들이켜고는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울 어머님도 안 하는 잔소리를 하시네요. 과장님이야말로 이번에 통과하셔야죠.”


아차차.

나는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싶었다.


나도 승급하고 싶지, 그런데 새로 생긴 적격성 검사라는 게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세상이 하도 빨리 바뀌니 법령이랑 수칙도 맨 날 개정되어 따라가기가 힘들다.

사는 게 그렇다. 나랏일이라고 쉬운 게 아니다.


다음날, 새로운 임무를 맡아 대전에 내려갔다. 한 여자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여자는 도심에서 떨어진 한옥마을에 살며 카페를 운영했다. 겨울이라 손님도 거의 없었지만, 탁자도 세 개만 놓여 있는 한산한 곳이었다.

여자는 매일 아침, 새로 생긴 SF Land를 다녀왔고 카페 문은 오전 11시에나 열었다. 알고 보니 군대에 침투한 스파이의 애인이었다.


우리의 타깃은 스파이로 활동하던 중 마약밀매 조직에 자금을 조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지난가을 필리핀 해상에서 벌인 소탕작전에서 탈출해 잠적을 했다고. 그 작전에서 우리 조직은 세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고. 한때는 군인이었다는데, 국가도 양심도 없는 무자비한 놈이었다.


며칠 후 눈이 밝아진 제임스가 합류했다. 1억 개의 화소가 탑재된 카메라와 동일한 기능을 한다는 그의 눈은 렌즈처럼 약간 튀어나왔다. 아마도 저렴한 곳에서 수술을 한 듯했다.


“천리안을 가진 금붕어네.”


내가 놀리자 그는 시무룩해져 울상이 되었다.


“진짜 그렇게 이상해요? 아, 짜증. 눈부심 같은 부작용은 있을 수 있다고 했지만, 눈이 튀어나온다고는 안 했거든요.”


이럴 땐 화제를 돌리는 것이 최선이지.


“1억 화소란 게 어느 수준이야?”


“1미터 떨어진 상대방 눈동자 속 풍경까지 포착해 낼 수 있어요. 제가 본 모든 풍경을 녹화는 기본이고 줌인, 줌 아웃해서 다시 보기도 가능하죠. 그냥 살아있는 카메라라고 보시면 돼요.”


“대단하군. 잠복근무에 최적이겠어. 어디 실력발휘나 해보라고.”


제임스에게 잠복근무를 맡긴 나는 시내의 SF Land를 찾아갔다.

여자가 본 장면을 재생하는 것은 쉬웠다. 직원에게 푼돈을 집어 주고 저장 파일 하나를 받았다.


영상 속, 남자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해군장교였고 여자는 청순하고 앳된 아가씨였다. 벚꽃 길을 걷던 두 사람은 기차역 플랫폼에서 멈추었다. 남자가 여자를 안았다. 그녀가 들었던 남자의 심장 박동 소리가 내 귓가에도 울렸다. 남자가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고, 여자가 기차에 올랐다. 창 밖에 그 남자가 뛰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가 외치는 입모양이 보였다.

사랑해.

장면은 여기서 끝났다.

그런데 영상이 꺼지기 직전,

여자의 시선이 마치 누군가를 확인하듯이

아주 잠깐 렌즈 바깥을 스쳤다.

그래서일까? 풋풋한 청춘영화 같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아무튼 홀로그램 안경만 있으면 남의 기억을 이렇게 재현해 볼 수 있다니.

놀라운 세상이었다.


잠복한 지 일주일 만에 드디어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영상에서 본 그 남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남자가 몰고 온 고급 외제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제임스와 함께 뒤쫓았다. 본부에게도 이동을 알렸다. 노출되지 않게 조심하라면서 절대 먼저 움직이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를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고. 큰 작전이 벌어질 분위기였다. 우리는 긴장하며 무장을 했다.

그들은 대나무 숲 공원에 들어갔다. 지원팀이 오기 전이었다. 그곳은 잘 자란 푸른 대숲이 빼곡한 곳이지만, 몸을 가리긴 쉽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어두운 색 패딩을 입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자는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면서 공원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숲 안에 복원된 초가집에 다다랐다. 두 사람은 양지바른 툇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겨울이지만 오후 해가 비스듬히 비쳐 들어 따뜻해 보였다.


우리는 맞은편 대숲 그늘에 몸을 숨겼다. 얼마 안 있어 한옥 뒤로 지원팀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팀장님, 저 여자, 임신했나 봐요.”

눈 밝은 제임스가 말했다.


망원경으로 보니 과연, 두 사람은 여자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웃고 있었다.


“풍경만 보면 꼭 소풍 나온 신혼부부네."

무심코 중얼거렸는데, 가슴 한쪽이 이유 없이 서늘해졌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초가집으로 걸어갔다. 본부가 기다렸던 접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초가집 뒤편 기동타격대가 조용히 움직였다.


대숲에서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불길한 소리를 냈다.



유진


“이제부터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적용기술과 알고리즘을 설명하겠습니다.”


가망 투자그룹 앞에서 온오프 동시 진행한 정필 대표의 데모는 흠잡을 데 없이 안정적이고 훌륭했다. 혼합현실과 신경과학, 생체의학을 결합한 신기술은 응용제품과 산업이 무궁무진했다.

회의 종료 직전, 내가 A Land를 대신할 브랜드를 제안했다.


“SF Land 어떻습니까?"


"과거를 기억하는 것, 생각해 내는 것을 넘어, 느끼고 감각하는 곳. Sense & Feeling Land.”

다들 소리 내어 따라 해 보더니 한 마디씩 했다.

에스에프라, 느낌 좋은데요.

귀에 쏙 들어옵니다, 거짓말처럼 놀라운 기술이잖아요.

직관적이고 기억하기 좋아요.


회의에서 브랜드명 SF Land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고, 투자자들은 즉시 참여 의사를 밝혔다. 테스트베드는 서울에서 석 달간 진행하기로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첫 번째 성공을 축하하며 서울 야경 아래 레스토랑에 앉았다.

눈부신 불빛과 샴페인 속에서, 나는 엉엉 울었던 첫날밤을 잊고 프로답게 그를 대하고자 마음먹었다.

발아래 휘황찬란한 불빛들도 우리가 이루어낸 성공을 축하해 주는 듯했다.

스치는 눈빛, 웃음소리, 창가를 가득 메운 별빛, 불빛들, 넘치는 샴페인.

우리는 술과 성공과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아니 서로에게 취해 있었다.


그는 강변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다. 벽에 걸린 금빛 액자에는 열 명도 넘는 가족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스무 살의 그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스무 살 당신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얼마나 예뻤을까?”

정필이 내게 말했다.


“난 저 야릇한 남자보다는 지금의 당신이 더 좋은 걸.”


정필이 구김살 하나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겠지?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양부모는 좋은 분들이었지만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다. 양아버지가 돌아가신 중학생 시절부터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양어머니는 나의 대학교 입학식도 못 본 체 뇌졸중으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성인이 되던 해, 나는 다시 고아가 되었다. 세상에 나 혼자였다.


남자들은 지금의 화려한 내 경력과 젊음, 외모 때문에 쉽게 다가온다. 나 역시 그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누구도 내 삶에 끼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욱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시선은 도발적으로 빛났다.

우리는 아파트 벽을 따라 돌면서 두 행성이 부딪치듯이 강렬한 키스를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수많은 밤들을 함께 보냈다.


테스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투자자들은 흥분했고, 체험 참가자들은 열광했다.

타임리프처럼 그 순간을 그대로 느낀다는 리뷰가 있었고, 일부 참가자들은 예상치 못한 기억까지 떠올리며 충격을 받았다.

이처럼 SF Land는 밝고 즐거운 순간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당신 인생의 가장 강렬한 순간.

그게 핵심이었다. 체크!


국정원과 법무부에서도 비밀리에 찾아왔다고 들었다. 피해자나 피의자의 기억을 재현해 낸다면 범죄 현장의 비밀을 밝혀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우선 장기 미제 사건부터 시험적용을 해 본다고 했다.

하지만 국가기관과 협상을 하게 되자 정필 대표가 당황했다. 나도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이 기술이 잘못 사용되면,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마음대로 건드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을 확장하려면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했다. 필은 체험 순간을 디지털 파일로 저장하고 반복 재생할 수 있는 플랫폼 개발을 시작했다. 기억의 저장소인 엔그램에 접근하고 체험하는 기술과 방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 얼핏 쉬워 보이는 목표이기도 했다. 자본은 충분하니 시간만 좀 더 필요할 뿐 결국 해결될 일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었다. 사내에서는 전담팀을 꾸려 지원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지휘한다.

SF Land의 가능성은 눈앞에서 폭발했다. 체크! 서울, 런던, 뉴욕, 도쿄… 20개 도시에서 동시에 오픈.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경험, 마치 내가 SF Land 속을 뛰어다니는 듯했다.



엠마


본부에서 무전을 보내왔다. 이제부터 기동타격대가 접수한다고, 그러면서 바로 앞 전방에 있는 우리 보고 빠지라고 했다.

제임스가 투덜거리며 쌍욕을 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지.”


한옥으로 다가가던 남자가 기동타격대가 띄운 드론을 먼저 발견했다.

코트 남자가 기관총을 꺼내자 드론이 반사사격.

관광용으로 지은 초가집은 주변에 엄폐물은커녕 무방비 상태였다.

타깃은 부상을 입고도 마루 밑에 숨은 여자를 향해 몸을 던졌다. 배신당했다고 판단한 코트 입은 남자가 타깃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댔다. 러시아제 RPL 30이었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타깃을 살리기 위해서 여자가 희생될 수도 있었다.

이대로는 여자도 뱃속의 태아도 위험하다.

순간 제임스가 뛰쳐나가 보호하려 했지만 총에 맞았고, 나는 반사적으로 코트 입은 남자를 쏠 수밖에 없었다. 눈밭에 피가 번지며 순식간에 상황은 끝났다.


총성에 놀란 숲 속의 새들이 푸드덕 거리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무심한 바람만 대숲에서 울어댔다.


코트 입은 남자가 죽었다. 감식 결과, 코트 입은 남자는 내가 쏜 총에 맞았다. 여자는 무사했다. 대 수술을 받은 타깃은 계속 무의식 상태라고 했다. 그가 깨어나면 뭐라도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누군가는 이 사태를 책임을 져야 했다.


다행히 제임스는 어깨에 총을 맞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제임스는 무차별 사격 중인 기관총에 여자가 죽을 수도 있어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갔다고 했다.

아름다운 그녀 자태에 마음이 가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게다 그녀는 임신부였다.


무고한 시민을 구한 일인데, 표창은 주지 못할망정, 조직은 희생양을 찾으려 했다.

본부에서는 작전실패를 우리 두 사람 탓으로 돌렸다. 명령에 불복했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서 임신부가 총에 맞거나 제임스가 총알 세례를 받는 꼴을 봐야 했단 말인가?

제임스와 나, 둘 중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총을 쏜 나여야 했다.


그래, 이 나이에 언제까지 이 일을 하겠는가.

결국, 큰 부상을 입거나 총이나 맞고 죽어야 끝날 일이었다. 흥분한 나는 사표를 홧김에 제출했고 조직에서는 말리지 않았다. 서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세상은 내게 언제나 차가웠다. 불만은 없다.

다 내가 쌓은 업보 때문이니까.



변두리 아파트는 지은 지 40년이 넘어 낡았지만 25층이라 조망은 좋다. 거실에 앉으면 멀리 남한산성까지 보였다.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운치가 그만이다.


커튼을 열자 거실 창밖에 파란 하늘대신 거대한 홀로그램 광고가 나타났다. 사표를 던지면서 쓸데없는 지출을 줄여야 해서 유료회원을 탈퇴했더니 무조건 광고 시청으로 등급이 전환됐다. 이젠 맘 편히 전망도 즐기기 어렵게 되었다. 사표 내고 퇴직금을 받을 거란 건 어떻게 알았는지 안전한 금융상품에 투자하라며 자꾸만 도표와 숫자를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 있으면 나이 오십도 되기 전에 파산한다는 시뮬레이션을 동원했다.

거의 협박 수준이다.

그래도 명색이 첩보기관에서 일했는데 이렇게 개인정보가 털려 광고에 이용되다니 한심했다. 그동안 내 앞에 나타나곤 했던 데이트 앱 광고가 그리울 지경이다. 멋진 근육질의 남자들이 프로필을 자랑하며 클릭해 달라고 다가오곤 했었는데, 회사에서 잘리고 혼자 집에 있다는 게 소문났나 보다.


난 아직 쌩쌩한 미혼인데 대놓고 독거노인 취급이다.


어휴, 나는 도로 커튼을 닫았다.


“잘 지내니? 벌써 봄이구나. 엄마는 회사를 그만두었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해.”

오늘은 여기까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언제 만나도, 아니 이번 생에 다시 만날 일이 없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고 싶었다.


현재 나는 무용하다.


지금까지 해왔던 첩보일은 바깥세상에서 별 쓸모가 없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봐도 딱히 해보고 싶은 것이 없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딸을 찾는 것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한국에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건강한지 알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취직하자마자 집에서 독립하면서, 베이비 박스가 있던 곳에 다시 찾아갔었다. 베이비 박스가 있던 골목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다.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었다. 첩보 일을 하면서 그나마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도 연락이 끊어졌다.

한 달을 쉬어보니, 이대로는 파산하기 전에 갑갑해 죽을 것 같았다. 몸마저 둔해지는 느낌이 싫어 운동 시간을 더 늘렸다. 평소보다 한 시간 더 격하게 운동을 한 후 샤워를 마치고 나와 맥주를 마셨다.


문득 여행이나 떠나볼까 싶었다. 여행지를 검색하고 있는데 제임스에게 연락이 왔다.

집 앞이라고 했다. 거실 창밖을 내다보니, 눈 밝은 제임스가 선글라스를 낀 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도 그의 새 어깨가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회사의 지원 프로그램으로 총 맞은 한쪽 어깨를 새로 장착했다.


“와, 새로 했다는 어깨야? 날렵한 게 꼭 스포츠카 같네.”

내가 칭찬하자, 그는 미안한 듯 발끝만 보고 걸었다.


우리는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술이 들어가자 새 어깨가 티타늄 재질로 귀한 것이라고 은근히 자랑했다. 최신 기능은 아니지만 자신은 레트로가 좋다나. 언제나 긍정적인 친구다.


“서운해하지 마시랍니다. 아, 언제라도 어깨를 바꾸시래요. 직원 우대조건은 유지시켜 준다고요.”


“아니, 웬일로 퇴직자 어깨까지 챙기는 거야? 난 여유가 없어 빚지긴 싫어.”


“그자가 깨어났어요. 선배 덕에 살게 된 걸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


“그자가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려는 지, 선배를 찾습니다. 행차 한 번 해주세요.”


“나 바빠. 여행 갈 거야.”


“진짜요? 어디요? 저도 데려가요.”

제임스가 두 손을 비비며 조르는 통에 우리는 큰 소리로 웃었다.


티타늄으로 만든 새 팔도 잘 비벼댔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웃는 게.

새삼 그 시절이 그리웠다.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다가, 제임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사람, 알고 보니 더블이었어요. 직급도 높아요.”


더블은 우리끼리 이중 스파이란 말이었다. 그랬구나. 생포를 강조한 이유가 거기 있었네.


“그자는 아니 그분은 이번 사고로 50% 이상을 로보틱스로 교체했대요. 그 많은 총알 세례를 받았으니 살아있는 게 기적이죠. 정말이지 이 바닥에서는 사이안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어요. 이젠 필수라니까요.”


떠들썩한 골목 식당에서 오랜만에 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 나왔다.

큰길을 향해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별 대신 홀로그램 광고가 번쩍였다. 여행지를 검색하고 나온 덕인지 이번에는 푸른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때마침 스치는 밤바람이 파도라도 되는 양 시원했다.


제임스가 물었다.

"선배, SF Land 가보셨어요?"


나는 전주 여자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다른 세상에 사신다니까."


술이 조금 취한 제임스는 꼭 가봐야 한다며 연신 강조했다.


"그래, 알았어. 꼭 가볼게."


그 순간, 전주 여자를 엿보았던 애틋한 기억이 스쳤다. 고백이었을까, 이별이었을까. 불현듯 튀어나온 기억은 내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듯했다.


바로 그때, 택시가 도착했고, 제임스가 어깨를 번쩍 들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선배, 저 가요. 그거 꼭 해보세요."



유진


SF Land는 글로벌 진출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현지 마케팅과 서비스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심천, 베를린도 후보지였으나 신경과학의 메카인 캘리포니아 대학들이 배후에 있어 인력 확보나 후속 기술개발에도 낫다고 판단했다.


정필 대표가 현지법인도 맡았다. 글로벌 펀드에서 개발자이자 대표인 그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 했다. 정필 대표는 내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SF Land의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되었기에 내 마음도 흔들렸다. 그를 매일 만날 수도 있다. 필드에서 일하고 싶다면 좋은 기회였다.


신기술을 가진 회사를 초기에 찾아내 성장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고 지원하는 것.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았다. 이익 극대화가 목표이고, 때론 냉정한 판단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것이 내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통제되는 것이 중요했다.

커리어를 위해서도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더 폭넓은 경험과 실전이 필요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 외쳤다.

‘유진, 정신 차려. 이미 선을 넘었지만, 더 이상 선을 넘어선 안 된다는 거 잘 알잖아.’


나는 스카우트 제안을 사양했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그에게서 135 레스토랑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살짝 긴장을 했는데, 양복까지 입고 나온 그는 밝고 활기차 보였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람 특유의 후광이 있었다.

어쩌면 그가 무언가를 준비했을 거란 예감은 적중했다.

그가 꺼낸 것은 비행기 티켓과 반지였다. 청혼을 했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 그의 등 뒤로 펼쳐진 도시의 밤하늘 풍경이 아스라했다. 첫날 우리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는 젊은 연인이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필의 가족은 사랑이 넘친다. 삼대가 모여 살았다. 형들이 결혼하고 막내인 필도 독립했지만, 매주 일요일 저녁 온 가족이 모인다고 했다. 한 번은 일요일 저녁 집으로 초대를 받았었다. 외식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부모님 집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다 함께 식사를 했다. 온갖 산해진미가 올라온 진수성찬이었다. 그 많은 음식을 필의 어머님이 손수 준비를 하셨다고 했다. 나는 쏟아지는 질문과 호기심에 체하고 말았다.


청혼을 받는 순간, 왜 그 장면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단란한 가족 모임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나는 숨이 막혀 아찔했다.


왜 이럴까?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나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했다.


“당신이 기뻐할 줄 알았어.”


“기뻐요. 진심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예요. 이게 우리 둘 다에게 나은 선택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진, 우리 서로 사랑하지 않았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에게서 받은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돌려보았다. 매끈한 감촉이 좋았다. 그는 능력 있고 매력적이고 따스한 남자였다. 그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아니 즐거움 그 이상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를 무척 좋아한다.

어쩌면 이게 사랑일지도...

그러나 그와 결혼한다면, 나는 그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 나는 필의 가족이 모인 그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나답지 않았다.


나는 반지를 손에서 빼어 다시 건넸다.

그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했다.

그는 놀란 듯 숨을 고르고, 샴페인을 단숨에 비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진, 당신은 멋진 여자예요. 그동안 행복했어요."


과거형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난, 당신이 벅차요. 당신을 향한 이 감정이 어떻게 변할지 두려워요.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는 없어요.”


“감정을 잘 아는 당신이, 감정을 두려워할 줄 몰랐어요.”


“잘 알아서 그래요. 감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우리, 그만 만나요.”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났고, 우리의 아름다운 밤은 끝났다.



며칠 후, 병원에서 의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임신 5주입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믿을 수 없어 모니터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작고 하얀 동그라미가, 빠르게 콩콩콩 뛰고 있었다.
내 마음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한꺼번에 요동쳤다.




엠마


입양센터를 찾아갔다. 베이비 박스에서 발견된 아가들이 입양되던 시절이 있었다.

아흔을 훌쩍 넘어 보이는 수녀님이 혼자 앉아 계셨다.

요즘은 태어나는 아기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입양 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30년 전 버린 딸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부끄러워하는 내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님은 자신이 알아볼 테니 가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집에서 연락오기만을 기다리려고 하니, 다른 일들이 손에 안 잡혔다. 거의 매일 찾아가게 되었다. 수녀님도 혼자 심심할 거 같고, 혹 연락이 와도 귀가 어두워 놓치실까 염려되었다. 오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시던 수녀님도 나를 위해 매일 기도를 해주셨다.

고맙고 따뜻했다.

수녀님이 믿는 신이라면 나 같은 사람까지 불쌍히 여겨 연결해 주시려나, 일말의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한 달 후, 처음 보는 젊은 수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예는 갖추었지만 시선은 냉랭했다.

노 수녀님은 치매로 입원하셨다고, 딸이 원했다면 벌써 연락이 왔을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고 가서 기다리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딸을 만나기 위해 뭐라도 하고 있어서 좋았었다.

이젠 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작정 기다리다가 미칠 것만 같아서 서울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광고에서 본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는 문화관광을 표방하는 섬답게 야간에는 홀로그램 광고를 금지했다. 덕분에 내 눈도 마음도 온전하게 쉴 수 있었다.


“안녕, 오늘은 한라산을 올랐어. 정말 아름답구나. 저기 발아래 앙증맞은 언덕들은 오름이야. 삼백육십 개가 넘는데. 너를 만나면 꼭 같이 오고 싶구나.”


나는 오름을 하루에 세 개씩 격파해 보기로 했다. 100일 안에, 모든 오름을 완주하는 걸 목표로 했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서귀포 시에서 SF Land 간판을 보았다.


여기에도 있구나.


문득 제임스의 말이 떠올랐다.

끌리듯 걸어 들어간 나는 그곳에서 딸을 만났다.


다음날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제임스에게 더블이었던 남자를 만나겠다고 했다.

사무실은 정부청사에서 겨우 한 블록 떨어진 빌딩에 있었다. 우주무역. 뜬금없지만 눈에 띄지도 않는 상호를 단 그곳은 전망이 좋고 널찍했다.


그는 정보로만 접했던 첩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전직 해군 장교답게 절도 있고 반듯하면서도 뭐랄까 이지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부드러웠다.


기계 인간이라더니 이 느낌은 뭐지?


사이안인데 적나라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긴장했던 나도 편안해졌다.


“꼭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왔군요.”


악수하는 그의 악력은 적당했고 손에는 온기가 있었다.

최첨단이구나.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A가 아닌 인간 비서였다. 이 정도라면 직급이 꽤나 높은 듯했다.


“엠마, 사격술이 뛰어나던데요.”


“아뇨, 제가 어깨만 안 다쳤어도 좀 더 빠르게 대응사격을 했을 겁니다. 그러면 당신도 총알 세례는 피했을 텐데.......”

나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싶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앞에 놓인 커피만 홀짝였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평생을 묻어온 비밀을 왜 이 남자 앞에서 털어놓으려는 걸까? 그가 어떻게 나올까?


역시 남에게 부탁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때 책상 위에 영상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안은 여자를 그가 뒤쪽에서 꼭 껴안아주는 짧은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기도 그 여자도 무사했구나. 세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부탁이 있습니다. 사람을 찾고 싶어요.”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들었다. 말주변 없는 내가 떠듬떠듬 이야기를 하는 동안 불필요한 추임새를 넣는다거나 곤란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누르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방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얼어붙었다. 그는 나의 SF Land 로그 기록을 보고 받았다고 말했다.

그도 내가 본 것을 본 것이다.


내 아기를 베이비 박스에 버리던 순간이었다. 박스 안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름 소리를 뒤로 하고 도망쳤던 나는 다시 돌아왔다. 추운 겨울에 아기가 무사할지 걱정이 되었다. 베이비 박스가 보이는 곳, 골목 안쪽 어느 집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다 깜빡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해는 이미 지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덮인 베이비 박스로 다시 돌아갔다.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어보니 아기는 없었다.

다행이다.

누군가 아기를 데련 간 것이다. 주저앉은 나는 엉엉 울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죄책감, 두려움, 한편으론 안도의 마음, 간절한 마음이 범벅이 되어 깨어났을 때, SF Land 시스템은 내게 자동으로 리부팅할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각과 감정에 복받쳐서 No를 누르려고 했는데, 거기서 보았다.

누군가 나와 똑같은 순간을 벌써 보았다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딸이었다.


“엠마, 이걸 보세요.”

한 달 전 찍힌 영상이라고 했다.


한적한 벚꽃 길이었다. 한 여자가 걷고 있었다.
걷다가 문득 멈춘 그녀가 꽃그늘 아래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화면에 그녀의 얼굴이 또렷이 잡혔다. 딸이었다.
한눈에, 그냥 알아보았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 커다란 눈과 반듯한 이마는 어릴 적 그 남자아이를 닮았다.

까무잡잡한 나와 달리, 아빠를 닮아 피부는 백옥처럼 하얬다.
딸은 혼잣말을 하더니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밝아, 세상이 환해졌다.
내 딸은 정말 예뻤다.

밝고 구김살 없이 잘 자라주었구나.


그녀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옛날 양반들처럼,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팔자걸음이었다.
어쩜, 그와 비슷한 걸음걸이였다.

내가 놀려대자, 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뼈대 있는 양반집안 후손이라 그렇다며 받아쳤었다.


그렇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저런 것도 닮는구나.


그 모습이 반가워,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니, 눈물이 났다.
뱃속 깊은 곳에서, 심장에서 봇물 터지듯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나는 손을 내밀어 영상 속 내 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무나 잘 컸구나. 엄마를 용서해 줄래?’


“딸이 당신을 닮았군요. 엄마를 닮아서인지 아주 멋진 여성으로 자랐군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이지 내 딸은 지적이고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랑 어딜 닮아요. 훨씬 예쁘고 세련되었는데요.”


촌스런 나를 닮았다는 말에 화를 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지만 분명한 건 딸 덕에 그런 말도 들었다는 사실이다. 자세히 보니 복스럽게 둥근 콧날과 입매가 날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내 마음은 그를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온 세상을 향해 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딸이 무탈하게 자라줘서 고맙다고, 그 아이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대신, 저도 부탁 하나 할까요?”

그는 내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동안 조직에서 나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며. 딸을 찾는다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의 지적은 맞는 말이었다. 갓난아기일 적 버린 엄마가 삼십 년이나 지나서 갑자기 나타난다면 누가 반기겠는가. 거기다 천하 무직이라면.

하지만, 명령이라면 사람도 죽여야 하는 나의 일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말씀은 감사합니다. 지금은 딸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전 그저 살아 있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잘 사는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 애 앞에 나타나겠냐는 말은 삼켰다.

그 애를 볼 수만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안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모든 조치는 취해놓았다며 원한다면 내근 업무로 전환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신세를 지기도 하고 누군가를 구해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일은 일이었다. 이 남자처럼 은혜를 꼭 갚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알아보아 주고 끌어주려는 사람도 처음 만났다. 그렇다면 세게 나가야지.


“어깨도 바꾸어준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말에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엠마는 러다이스트인 줄 알았는데, 잘 판단했어요. 손녀를 번쩍 안아주려면 어깨가 튼튼해야 합니다. 게다가 명사수잖아요.”


“손녀요?”

깜짝 놀라는 내게 그가 웃으며 화면을 가리켰다.


일주일 전 핼리 캠으로 찍힌 장면이었다. 고층 건물, 불 꺼진 창가. 몇 초 후 불이 켜지자 실루엣이 비쳤다. 여자였다. 카메라가 클로즈업되자, 그 얼굴이 내 딸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딸은 불쑥 나온 둥근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숨을 고르고… 손이 덜덜 떨렸다.


"혼자서 저렇게 잘 크다니… 게다가 손녀까지…."


놀라 떠듬거리는 내게 그는 찡긋 윙크했다. 언젠가 보았던 젊은 해군장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손녀를 안아본단 말인가. 그 아이를 만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다니… 그래도 마음 한편은 간절했다.

하늘로 붕 뜬 듯 들떴다.

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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