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나 Apr 16. 2020

냉장고 속을 비우는 일

휴직기간이 1년을 넘어가면서 뜻하지 않게 발견한 바가 있다면, 나는 생각보다 집에 오롯이 있기를 잘하는 편이며 생각이나 계획 없이 사는 삶이 주는 불안함보다는 편안함을 조금 더 크게 느낄 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 시작에는 삐걱거림도 많았고, 무엇보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그닥 많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꽤나 불편했다. 밥을 한 끼 지어먹으려면 동영상이며 책을 뒤적거려 만드는 방법을 몇 번씩 곱씹어 이해해야 했고, 일하던 중에는 주말에나 가능했던 책/영화 몰아보기가 일상이 되니 이렇게나 아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여전히 매 끼니 밥을 먹고 치울 즈음이면 다음 식사 메뉴를 고민하게 되지만, 전처럼 부담스럽거나 하기 싫은 마음이 크게 앞서지는 않는다 이제.


여전히 내가 요리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음식을 만들며 차츰차츰 냉장고 속 재료들을 남김없이 싹 쓰는 것에서 나는 꽤나 큰 쾌감을 느낀다는 것 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미리 사야 할 것들을 적어 내려 가는 것부터 장을 보고 냉장고를 채워둔 후, 하루하루 무엇을 해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여 메뉴를 결정하고 그에 따른 재료들을 소진해 가는 것. 부엌일이 처음이던 때에는 메뉴를 정해두고 재료를 샀다면, 이제는 기본적인 재료들의 목록을 대략적으로 구비해 두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가능한 요리를 생각해 낸다는 게 조금 달라진 점이다. 장을 보고 돌아와 냉장고를 가득히 채우고 나면 지갑이 두둑해진 것 마냥 든든하기도 하지만, 하얀 냉장고 속살이 다 비칠 만큼 깔끔하게 비워내는 것이 주는 쾌감 역시 이에 뒤지지 않게 만족스럽다.


나의 식생활을 내 스스로 꾸려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큰 성취감을 준다. 혼자 지낼 때에도 분명 밥을 지어먹었을 텐데, 장을 봐 두고 한참 지나 열어본 냉장고에는 내가 이런 것도 사놨었나 싶은 재료들이 발견되기도 했고 대부분은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겨우 냉장고 속이지만 그 속에 무엇이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를 선명하게 알고 지내는 삶의 작은 변화가 좋았고, 여전히 부족한 실력이지만 같은 재료라도 만들어보지 않았던 방법들을 가끔은 시도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몰랐던 재능을 찾은 기쁨보다야 덜하겠지만, 나의 삶의 작은 구석구석을 스스로 생각하고 직접 손대어 만들어 간다는 것이 적어도 내게는 생각했던 것보다 큰 즐거움이라 다행이다 싶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지금까지 무엇하느라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고 살았을까? 뭐 대단한 일 하고 사느라 이런 생생한 기쁨을 저만치 밀어 두고 밥벌이의 지겨움만을 매일같이 기억하며 살았을까? 그때의 나에게는 그럴듯한 명분과 핑계가 있었겠지만, 왠지 좀 짠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하루하루 살면 살수록 나 하나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건 대단한 목적이나 가치라기보다 그저 먹고사는 일, 아프지 않고 일상을 지키는 힘 정도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반증이겠지만) 건강을 내어주고 얻을만한 건 세상에 없다는 말을 오늘도 속으로 되뇌었다.


겨우 고작 그래 봐야 냉장고 하나일 뿐이지만 시간을 들여 생활을 이어온 덕에 나는 그 속을 비우고 채우는 기쁨을 알았고, 그로 인해 나는 삶의 지평을 한 뼘 정도는 넓힌 것 같은 기분 좋은 성취감을 맛봤다.



이전 09화 알아서 잘하겠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