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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생활 Mar 18. 2016

초콜릿, 슬픈 역사를 가진 마약 식품의 원조

초콜릿의 성분과 효능


마약김밥, 마약커피, 마약토스트… 너무 맛있어 중독성 있게 계속 찾게 되는 음식, 식당의 이름 앞에 마약을 붙여 부르는 게 유행이다. 그런데 사실 중독성으로 따지면 초콜릿이 마약 식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조금 짜증이 나거나 우울할 때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신경이 날카로울 때 커피로만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을 달래기 위해 에스프레소에 달콤한 초콜릿이 들어간 카페모카를 마신다. 아이들은 뭔가에 화가 나있다가도 핫초코를 타 준다고 하면 금세 표정이 밝아진다. 카페모카나 핫초코는 따지고 보면 초콜릿의 음료 버전이나 마찬가지다. 딱딱하면서 부드러운 고체 형태의 초콜릿이 원래는 카카오 가루로 만든 마시는 음료에서 기원했으니 말이다.


초콜릿은 500가지가 넘는 화학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초콜릿이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이유는  초콜릿에 들어 있는 성분들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름이 좀 어려운데, 초콜릿은 도파민, 오피오이드, 엔도르핀, 세로토닌 등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생성과 분비를 자극한다. 도파민은 의욕감과 행복감, 오피오이드와 엔도르핀은 고통 완화와 통증 억제, 세로토닌은 행복감과 연관이 있는데 부족하면 우울 또는 불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또 초콜릿은 카페인과 테오브로민 성분이 있어 심장박동 촉진, 혈관 확장 등 적당한 긴장과 활기 넘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초콜릿이 처음 만들어 진 곳, 메소아메리카


초콜릿의 주원료는 카카오다. 카카오나무의 열매인 카카오 콩을 볶아 껍질을 제거하고 빻은 후 가열하면 반죽처럼 되는데 이게 초콜릿 원액이다. 이 카카오나무는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데 덥고 습한 기후여야 한다. 초콜릿은 이런 기후를 가진 메소아메리카에서(현재 멕시코, 과테말라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 지역) 처음 만들어졌다. 이곳은 기원전 1200년경 올멕문명, 기원전 600년경 마야문명이 있었고 후대의 아스텍 제국까지(1522년 멸망) 이어진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로 추정하면 음료 형태의 최초 초콜릿은 올멕문명 이전인 기원전 1900년~1500년 사이로 보인다. 멕시코 남동부 치아파스주에서 발견된 22개의 항아리를 고고학자들이 분석한 뒤 2007년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기원전 1900년~1500년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흙항아리에서 초콜릿 성분인 테오브로민과 카페인이 나왔다. 이 외에 올멕문명 시대인 기원전 1200년~900년 사이, 마야문명 시대인 기원전 600년경의 토기들에서도 테오브로민이 나와 메소아메리카 지역은 수천 년 동안 카카오를 재배하고 이를 활용해 초콜릿을 만든 걸 알 수 있다.


거품을 일으키기 위해  다른 항아리로 초콜릿을 붓는 아스텍 여인 그림


아스텍 왕국의 멸망과 초콜릿의 유럽 전파


초콜릿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건 카카오가 유럽으로 전해지면 서다. 1502년 콜럼버스가 최초로 카카오 콩을 유럽으로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초콜릿이 대중화된 건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 때문이라고 한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스텍 왕국을 멸망시킨 스페인의 군인으로 식민지 건설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코르테스는 1519년 500여 명의 병사아스텍 왕국의 황금을 약탈하고 총, 대포, 말 등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3년 만에 아스텍 왕국을 멸망시킨다.


아스텍 왕국을 멸망시키고 카카오를 스페인에 가져간 에르난 코르테


당시 아스텍 왕국의 초콜릿 음료는 귀한 음식으로 왕과 귀족, 전사들 정도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하고 맛도 오늘날과는 달리 매우 쓴 맛이었다. 코르테스는 초콜릿 음료의 원료가 되는 카카오 콩이 화폐로 쓰일(토끼 1마리 10알, 노예 1명 100알) 정도로 귀한 것이라는 걸 알고 1528년 카카오 콩과 초콜릿 제조도구를 스페인으로 가져간다. 초기에는 쓴 맛 때문에 인기가 없었고 이후 설탕이 들어가며 맛이 달아진다. 초콜릿을 먹으면서 그 효능에 빠지게 된 스페인 사람들에게 초콜릿은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스페인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식민지에 카카오나무를 재배하며 왕실의 보호 아래 초콜릿 사업을 유럽 내에서 100년 가까이 독점했다. 따라서 이 당시 유럽 상류층도 초콜릿은 쉽게 맛볼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상인 안토니오 카를레티가 초콜릿을 이탈리아에 전하고 스페인 출신 공주들이 프랑스 왕들과 결혼하며 프랑스에도 퍼지게 되는 등 이후 약 200년에 걸쳐 영국, 벨기에, 스위스, 미국까지 세계 각지로 전파된다.


초콜릿의 인기가 유럽을 휩쓸며 노예무역도 등장한다. 늘어나는 카카오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을 농장에서 강제노동시켰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옮긴 천연두로 많은 원주민이 죽고 노동력이 부족해진다. 이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을 노예를 잡아와 카카오 농장에서 강제로 일하게 한다. 아스텍 왕국의 파괴와 노예무역은 욕심 많은 유럽 강대국들이 만들어 낸 참극이다.


햇빛에 말리는 중인 카카오 콩


초콜릿의 대중화, 기계를 활용한 대량생산


현대적인 판 형태의 고형 초콜릿은 1847년 영국의 조지프 프라이가 만들었다. 카카오 분말과 카카오 버터가 섞인 반죽을 틀에 부어 판 모양으로 만들어 모양도 좋고 부드러워 먹기도 편한 초콜릿이 되었다.


대량 생산을 통해 초콜릿의 대중화를 이끌어 낸 것은 미국이다. 1765년 제임스 베이커와 존 해넌은 미국 최초의 초콜릿 공장을 세워 수력을 활용해 카카오를 빻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기계를 사용한 건 ‘허쉬’사다. 1894년 밀턴 스네이블리 허쉬는 초콜릿 회사 ‘허쉬’를 세워 카카오 버터 대신 식물성 기름을 사용해 더운 날씨에도 잘 녹지 않는 초콜릿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참전 군인들에게 초콜릿을 전투식량으로 지급했는데, 초콜릿을 작은 조각으로 자르고 포장해 전달하는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자동화를 통한 초콜릿 대량 생산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이어져 생산 원가가 대폭 낮아졌고, 초콜릿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진정한 대중식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초콜릿은?


초콜릿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1896년 고종황제가 1년간 러시아 공관에서 머무를 때(아관파천), 독일인 통역사 손탁이 고종에게 커피와 함께 진상했다는 것이다. 또 러시아 외교관 부인이 초콜릿과 화장품을 명성황후에게 바쳤다는 설도 있고 이토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상궁들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문 기사 중 가장 오래된 건 동아일보 1926년 8월 30일 자의 ‘부인과학’ 이란 코너에 소개된 ‘챠클넷트’라는 기사다. 주부를 대상으로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기사인데 초콜릿을 최고의 맛난 것으로 소개한다.


  

  ‘챠클넷트’는 서양과자의 원료라고할만치 어느 과자를 물론하고 맛난과자에 드러가지 아니한 것이 업슴니다. ‘챠클넷트’를 처음 먹는 조선사람은 쓰기만하고 아무 맛이 없지마는 서양사람들은 ‘챠클넷트’라면 이 위에 더 오를 수 없는 맛난 것으로 여깁니다. 어린아이가 울면 ‘챠클넷트’ 줄게 울지마라하고 달냄니다.                                

- 동아일보 1926년 8월 30일 "부인과학, 챠클넷트"



이런 소개 차원에서 나아가 5년 뒤 1931년에는 초콜릿이 언제 생겼는지 기원을 알려주는 기사가 나오고, 1935년에는 백화점에서 초콜릿을 훔친 사람에 대한 기사도 있다. 기사로 보건대 초콜릿은 1930년대 초반 무엇인지 알려는 졌으나 1930년대 중반까지도 여전히 사치품이자 백화점에서나 파는 비싼 기호식품이었다.



    요즈음은 어떠한 시골에서든지 초코레트를 모르는 곳이 드뭅니다. 이 초코레트는 대체 어느 때부터 생긴것인가 또 어느곳으로부터온것인가. 카카오 나무 발견자로 콜롬버스 멕시코 항해할 때 발견해 스페인으로 가지고 가서 소개했다.

- 동아일보 1931년 6월 19일 “이야기거리, 「쵸코레트」는 언제 생겻나”


   예수교전도사가 5월 21일 오후 5시경 삼월 백화점에서 쵸코레트 네 갑과 껌 한갑을 점원의 눈을 엿보고 슬그머니 훔쳐가는 것을 백화점 감시원이 발견하고 붙잡아 경찰서로 인도한 것이다.

- 매일신보 1935년 05월 23일 “쵸코렛과 껌을 窃取한 傳導師”



국내에서 초콜릿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건 국산화가 이루어진 이후인 1970년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우리 나라에 주둔하면서 1960년대에 미군들의 보급품이었던 미국산 초콜릿이 부대 밖으로 흘러 나왔다. 하지만 이때 역시 부자들이나 먹는 귀한 기호식품이었지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순수 국내 기술로 제과 회사를 통해 만들어진 최초의 초콜릿은 1967년 해태제과에서 만든 ‘나하나’ 초콜릿이다. 이어 1968년 9월 동양제과(오리온)에서‘넘버원’ 초콜릿과 ‘님에게’ 초콜릿 3종(하이밀크, 세미밀크, 스위트)을 출시한다. 롯데제과는 1975년에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해 2월에 지금까지도 생산되는 최장수 기록을 가진 ‘가나’ 초콜릿을 내놓는다. 경제 성장을 통한 소득 수준의 향상과 초콜릿 제조 기술이 향상되면서 1970년대 초콜릿의 본격적인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가나산 카카오 콩에 스위스의  초콜릿 기술자 '막스 브라크'를 영입해 만든 가나초콜릿, 75년 100원에 출시되었다


초콜릿과 공정 무역


달콤한 초콜릿은 중앙아메리카의 올멕, 마야 문명에서 음료로 시작해 16세기부터 유럽 각국에 전파되며 오늘날 세계인들에게 중독성이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카카오 재배를 위해 노예무역으로 고통받았던 아프리카인의 삶이 단순히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고 있다. 지금도 서아프리카에서 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카오 농업을 하면서 불공정 무역으로 헐값에 카카오를 팔아 어렵게 살고 있다.


또 세계 최대의 카카오 생산지인 아프리카 소국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미성년 어린이들이 하루 12~15시간씩 카카오 농장에서 혹사당한다. 주로 인신매매로 오게 된 아이들은 집단 수용소 같은 곳에서 매질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사실상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게 혹사당하며 카카오 열매를 따는데 이 아이들은 심지어 초콜릿이 무엇 인지도 모르고 먹어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하니 말 그대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대의 초콜릿 회사이자 카카오를 대량 구매하는 네슬레는 코트디부아르 농장들의 가장 큰 고객이다. 네슬레는 노예 어린이 문제를 알고 있지만 노동착취는 기업의 책임이 아니고 농장을 일일이 감시할 수 없다며 소송을 하고 있다. 이게 2016년 초콜릿 산업의 현실이다. 그 옛날 초콜릿이 처음 나왔던 시대처럼 다시 초콜릿이 귀해지고 가격이 올라가더라도, 진짜 제대로 된 공정 무역을 통해 아프리카 불쌍한 아이들의 삶이 달라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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