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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맘 Apr 18. 2022

바닷마을 나의 유년

마당에 파도가 너울거리던 이모야네 집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동시에 나의 유년이 펼쳐진다. 이모와 오랜만에 영상통화를 한 이유일까. 건강이 좋지 않다기에 걱정스러웠던 이모는 휴대폰 너머에서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픔이 묻어나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이모의 아픔까지 감추려 나는 더 밝은 척을 해 보였다. 어느덧 일흔의 나이에 접어든 이모에게서 그 시절의 외할머니가 보였다. 쪽빗으로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모양만 헝클어진 파마머리로 바뀌었을 뿐. 할머니 손에 크던 나를 데려와 길러주어서인지. 이모를 보면 할머니가 떠오를 때가 있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이모가 잇따를 때가 있다.


그런 이모가 아프다. 할머니도 편찮으셨다고 했다 많이. 그 당시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암이 할머니에게, 지금의 나로서도 가늠할 수 없는 암이란 존재가 이모에게 찾아왔다. 할머니가 암과 싸울 때, 고작 열 살 남짓이었던 나는 할머니 따라 병원에 한 번 가본 적이 없고, 그저 병원에 가 계시면 깊은 밤 속에 혼자 남겨져 할머니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떠나시던 날에는 임종도 입관도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어른들이 말했으니까.


이모가 암이란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엔 내가 너무도 멀리 있다는 이유로 엄마를 괴롭혔다. 내가 멀리 있어 못하는 대신 엄마가 좀 챙겨달라고, 부탁한다고. 근데 그건 핑계라고 나는 더 이상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당시 어른이라 부르던 어른들의 나이에 어느새 나도 와있었으니까. 그리고 포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저 고생할 이모를 꼭 안아주고 싶어서.


이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밝았다. 식사하는 내내 우울한 기운은 새어 들어오지도 못하도록 모두가 빈틈없이 웃고 또 웃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모부의 어두운 얼굴이 도드라졌다. 워낙 섬세하시고 정이 많은 분이라 이모만큼이나 마음이 쓰였다. 자식이 없으니 어디 기댈 곳 없이 이모부 혼자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일까. 새까맣던 머리가 하얗게 센 지 오래, 마당 한편에서 이모의 오랜 새 신발을 붙잡고 밑창과 씨름하는 이모부께 시답잖은 말들을 건네보았다.


 언제나 제주에 한번 오시라면 비행기에서는 담배 못 태워서 안된다고 말하셨기에, 비행기 타기 직전에 담배 태우고 딱 50분만 참으면 비행기 내리자마자 또 피울 수 있으니 제주도 꼭 한 번 오시라고, 오십 분 눈 감았다 뜨면 금방이라며 이모야 수술 잘 끝내고 회복하면  두 분이 같이 꼬옥 오시라고. 손가락 걸고 도장도 찍었다. ‘허허 알았다’ 그제야 옅은 미소를 띠시는 이모부, 활짝 웃으실 때면 깊은 주름살도 지울만치 밝아지는 환한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마당에 나와 한낮의 햇살아래 모여 앉았다. 담벼락에 놀러 온 제비 노랫소리에도 귀 기울였다가, 차가운 이모 손도 비비적거리며 녹여주었다가, 물끄러미 이모부 한 번 살피다 보니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이제 고마 커피 한잔 묵고 가라‘ 는 말에 주전자에 물을 올리는데 오랜 주전자가 또 한 번 발목을 잡는다. 13년인가 14년은 됐겠지, 뚜껑은 사라진 지 오래고 손잡이의 나사는 헐거워져 흔들흔들, 어디 떨어뜨리기라도 했는지 둥근 주전자가 찌글하다. 분명 지난번에 새 주전자를 보냈는데도 아직 이 주전자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아쉬운 마음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우리의 세월이 덕지덕지 묻어있어서.


떠나는 길, 많이 야윈 이모야를 있는 힘껏 안아줬다. ‘우리 이모야 잘 부탁하니데이’ 하며 마음고생이 심할 이모부 손은 더 꼭 잡아드렸다. 곧 다시 만날 텐데도 괜히 다들 울컥해지는 시간. 눈물 훔치던 그 뒷모습을 보며 뒤돌아서야 했던 게 아쉽다. 한 번씩 더 안아주고 눈물이 나면 그냥 함께 울어버릴 것을.



이모야 고마워. 이모야가 아랫마을로 내려가 집을 지었을 때 어린 나인데도 그 집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다. 근데 고맙게도 내가 한동안 그곳에서 함께 온기를 나눴네. 이모야 집에서 둘러앉아 뒷집 목소리 큰 아지매네랑 함께 먹었던 대게 맛 잊지 못한다. 이모부 곁에 앉아서 화투 점치던 숱한 날도, 가족들 모일 때마다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던 날들도 잊지 못한다. 내 다 커서도 공부하니라 이모야 집 안방에 콕 박혀있을 때 이모부가 건네주시던 맥주랑 용돈, 그 안에 담긴 마음도 잊지 못한다. 이모야랑 같이 목욕탕에 갔던 날도, 이모부 오토바이 타고 읍내 의원에 갔던 날도, 이모야 일하던 축양장에서 물고기 구경하던 것도, 이모야 집에서 내 친구들이랑 이불 덮어쓰고 노래 부르고 고동 쪄먹던 날들도 말이야. 김장하던 날 손에 물도 못 묻히게 하던 것도, 내 남편감 인사시키러 갔던 날의 진수성찬도. 더 먹어라 더 먹어라 갈 때마다 내밀던 고봉밥도, 내 온다고 무쳐준 미역 장찌도, 출산했다고 직접 말린 미역에 함께 부친 이모야 이모부 사랑과 정성, 절대 못 잊지.

마당에 파도가 너울거리던 이모야네 집에서의 모든 기억, 사랑, 마음이 내한테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남아있다. 그러니 내가 고맙지 않을 수 있나, 이모야가 아프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내 유년에 보석을 심어줘서 감사해. 이 보석들 이제 이모야한테 고대로 돌려줄게. 우리의 반짝이는 보석들이 이모야한테 닿아 희망이 되길 바라며. 이모야 수술 잘 될 거고 우리 건강하게 웃으며 다시 만나자. 그때는 내가 우리 집에서 이모야 따신 밥 한 끼 지어드릴게. 곧 또 보자! 좀 더 자주 보자는 마음을 담아,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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