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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맘 Feb 16. 2021

슬기로운 며느라기의 명절

나만이 어루만질 수 있는 산후우울증_나는 내가 지킨다!

 결혼 3년 차 누군가의 아내, 엄마 그리고 며느리가 되었다. 나이 서른에 접어들면서 부여받은 여러 역할과 의무들은 내가 지나온 삶의 많은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기꺼이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중이지만 내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고, 또 해도 해도 쉽지 않은 부분이 바로 며느리로서의 도리이다. 남편의 집은 유교적 배경이 짙게 베여있다. 가족도, 제사도 많은 데다, 한 동네에서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와 그 전통이 오래도록 유지되고 있다. 반면에 우리 집은 핵가족화로 이미 많은 것들을 편리하게 바꿔놓은 전형적인 도시의 가족이다. 나 역시 어릴 적 할머니 집에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보내던 명절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으므로, 결혼 직후에는 이런 시댁의 새로운 문화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인지 여러 번의 제사와 명절을 지내오며, 명절이나 제사가 다가올 때 즈음이면 뚜렷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곤 한다. 마치 생리증후군처럼 디데이가 다가오기 전엔 예민하고 날카로워지는가 하면, 다녀와서는 이상하게 시름시름 며칠을 앓아눕는다. 기질적으로 예민한 나는 아이를 기르며 가사에 사업까지 이 모든 걸 멀티로 해내기 위해, 지인과의 만남이라던가 하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는 최소화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제사나 명절 같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마음을 다잡는데도 늘 방전이 되고 만다.

결혼 후 첫 명절을 맞이하던 날, 그날의 소란한 마음을 떠올려 본다. 이미 몇 번의 제사로 단련된 몸이기도 하고 또 임신 중인 상태였기에 그리 부담 없이 찾았던 시댁. 바쁘게 움직이는 어머니들의 손놀림을 눈으로 다 따라가지 못하고 놓치기 일쑤.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겠다 싶어 자꾸만 근질거리는 입에서 튀어나오던 ‘제가 할게요!’라는 눈치 없는 말들.

웹툰 며느라기를 본 적이 있는가. 사춘기, 갱년기처럼 며느리가 되고서 겪게 되는 시기를 의미하는 말, 며느라기. 제사를 다녀올 때마다 명절을 지날 때마다 왜 그리 남편을 들들 볶았는지, 왜 며칠 밤을 잠 못 이뤘는지 며느라기를 보고서야 알았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제법 늦게 알아차리긴 했지만, 이를 알고부터는 하나하나 곱씹고 기록하며 나만의 대처법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불편한 기억들을 들추고 곱씹는 건 마음건강에 좋지 못하다. 때문에 수시로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는 과정을 겪게 되지만 그 과정이 없다면 이렇게 단기간에 단단해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여기서는 곱씹고 곱씹었지만 소화하지 못해 이번 명절까지도 불쑥 튀어나오곤 하던 불편함 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치졸해 보일지 몰라도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다시 꺼내어 곱씹지 않기 위해 했던 나의 노력들까지.


불편함 하나.   음식을 비롯한 모든 준비는 며느리들의 몫인가
제사 때도 마찬가지지만 주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준비는 왜 항상 여성들의 몫일까. 친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느라 바쁜 건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옆에서 용돈벌이로 설거지 정도 도와주던 나. 그에 반해 명절날 아침 8시가 되면 그제야 일어나 씻고 정장까지 차려입고서 나타나는 우리 집 남자들. 그들은 말끔하게 차려입고서 잘 차려진 제사상 앞에, 엄마와 나는 후줄근한 차림으로 미처 못 치운 음식과 함께 식탁 앞에 서있던 그날의 불편함이, 최소 10년은 지났을 일인데도 아직까지 기억 한편에 남아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몇 번의 제사와 명절을 지나오며 수시로 남편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왜 자식들은 남자들인데 준비는 남의 자식들이 하느냐고. 왜 우리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당신들은 숟가락만 올리냐고. 그럼 남편은 자기도 제기에 음식 담고, 제사상에 자리 배치하고 할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 그럼 이제 요리도 같이하자! 나도 제기에 음식 담아주고, 당신 도와서 제사상 차리는 것 같이 할게!’

그래서 한 번은 남편을 데리고 주방에 들어갔더니, ‘네가 여길 왜 들어오냐’며 남편 등을 떠미는 작은 어머니들. 이제는 그냥, ‘조상님들, 우리 아이 잘 봐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한다. 대신 후줄근한 내 모습은 초라할 것 같아 최대한 차려입은 노동복 차림에 전을 굽는 것으로 타협했다.

불편함 .  며느리들 밥상은  따로인가
다 차린 제사상 앞에서 남자들이 절을 하고 나면, 제사상을 치우는 것은 또 며느리들의 몫이다. 제기들이 1차 설거지로 나오고 설거지가 시작됨과 동시에 누군가는 이미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제사상 올라간 메뉴 그대로, 그릇만 달리해 다시 밥상으로 올리면 숟가락을 놓기도 전에 자식들은 당연한 듯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근데 며느리들의 자리는 부엌에 따로 차려진다. 때때로 여기엔 곧 며느리가 될 누군가의 딸도 함께 앉곤 한다. 이제 막 자리에 앉아 밥 한 술 뜨려는데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물 좀 주라, 커피 물도 올리고’
친정에서도 마찬가지. 외갓집에 가면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따로 떨어진 상에서 식사를 하던 외숙모, 그래도 어른인데 내가 저리로 가고, 숙모가 여기로 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식사 후엔 괜스레 마음이 쓰여 ‘제가 설거지할게요 숙모’ 하고 곁으로 가면 ‘결혼하면 질리도록 해야 된다. 앉아서 쉬어’ 하며 언제나 돌려보내던 외숙모.
결혼 후 처음으로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는 외숙모 곁에서 아이들과 함께 앉아 밥을 먹었다. 누군가의 등을 보며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건, 식당 안의 남의 등판이 아니고서야 꽤나 섭섭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괜스레 나 여기 있어! 하며 이쪽으로도 한 번 돌아보게끔 말도 걸어보고 저쪽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나면 궁금해 목을 쭈욱 꺼내보기도 한 식사였다.

몸부림 하나.  여보!  애   먹여줄래?
 남편이 아이를 안고서 불편하게 밥을 먹길래 ‘여보 편하게 먹어요’ 하고 아이를 주방으로 데려왔더랬다. 이유식 준비 후 나도 며느리 테이블에 앉아 밥 한술 뜨려는데 들려오는 커피 주문.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커피를 타는데 거기서 눈치 없이 믹스커피를 주문하는 우리 남편. 여전히 눈치 없이 앉아있는 남편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며, ‘여보 커피 마실 여유가 있구나, 나도 밥 좀 먹게 애 밥 좀 먹여줄래?’ 하니 그제야 아차 싶어 엉덩이를 뗀다.


몸부림 .  여보 커피 정도는 당신이 타도되지 않아?
아침 식사 후, 큰집에 모여 앉은 식구들. 다시금 안방에서 들려오는 커피주문. 방금 커피를 마시고 온 터라 이번엔 차로 달라기에 마침 또 앉아있던 남편에게 쟁반을 건네주었더니 하는 말,
“여보, 난 물커피가 아니라 믹스커피..“
“(아니 이 양반이) 여보! 그럼 믹스커피는 당신이 좀 타야겠어!”
끝날 때쯤 되니 나 만큼이나 눈에 퀭해진 우리 남편, 나를 지키기 위해 남편을 못살게 괴롭힌 꼴이 된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어쩌겠나.


돌아오는 길, 별다른 이슈 없이 마무리된 명절이지만 불편함의 조각들이 자꾸만 마음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언제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고생했어, 그래도 점점 간소화되고 바뀌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줘.” 룸미러로 눈치만 살피던 남편이 침묵 끝에 먼저 말을 건네온다. 사실 나도 안다. 열 번이 넘던 제사를 서너 개로 합제하고, 명절 음식의 가짓수도 양도 눈에 띄게 줄었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배려인지 그만큼 시대에 맞춰 느리지만 그들만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깊은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알아. 다만 우리 세대에선 이런 불평등은 없어. 자식들도 뭐든 같이 준비하고 같이 정리해!”

룸미러에 비친 그를 향해 눈을 흘겨주었다. 사실 내가 가장 두려운 건, 지금은 울끈불끈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불편함들이 어느새 당연해질까 봐, 곧 무뎌져 엄마처럼, 어머니처럼, 여느 며느리들과 같이 그러려니 넘어가고 점차 적응 해나가게 될까 봐서이다. 우리 세대에서 변화를 기약하려면, 쓰고 쓰고 또 써서 내 마음에 새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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