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첫날 쓴 유서

지금 이 순간 여행 그리고 명상

by 라온제나





뉴질랜드 (52).jpg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는데 막상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느리게 다가왔다.

내가 늘 꿈꾸던 여행을 하게 된다는데 기쁘기보다는 담담했다.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은 그저 낯선 환경에 나를 내 맡겨 보고 책 읽고 글 쓰는 여행이었다.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유서를 써보기로 했다.

아래는 내가 여행 첫날 쓴 유서의 내용이다.







18년 2월 20일 [여행하며 쓴 일기, 유서]



여행을 떠나기 전 썼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유서 쓰기’였다.
쓰려는 목적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더 생생히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런 의미로 써 내려가다 보니 그냥 그 순간 나에게 쓰는 편지가 되었다.
여행을 하며 힘들고 지치고 또 무기력한 감정이 올라올 때 다시 한번 꺼내봐야겠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계속 몸이 긴장되고 신경이 쓰였다.
이상하게 배가 아프고 잠도 안 오고, 마치 커피를 많이 마셨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새로운 도전 앞에 설렌다는 느낌보다는 긴장이 되고 몸이 붕 뜬 느낌이 들었고,
어느 것에도 집중되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에 멍을 때리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문득 가슴속에 묵혀두었던 ‘세계여행’이라는 이름의 소망을 스치는 바람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 땐 순서 있어도 갈 땐 순서 없다’는 생각을 항상 하는 나로서는 하고 싶은 것 하고, 듣고 싶은 것 듣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그렇게 만족된 상태에서 생을 떠나고 싶다.

그래서 그토록 자유를 갈망했는지 모른다.

6개월 전의 나는 세계여행이란 수단을 통해 내 인생을 마음껏 살아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 마음이긴 하지만 큰 기대는 없다.


갇혀있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애쓰지 않으면서 유유히 흘러가고 싶다.
흘러 흘러 문득 어느 아름다운 곳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 다른 물들 과 함께 강을 만들고 바다를 구성하고 싶다.

아이들 같은 순수함을 잊지 않고 어르신들의 겸손함과 여유를 어깨너머 배우며 내 마음에 온전히 나로서 살 수 있는 그런 삶. 그런 여행,
내 안의 강박적 순환고리를 끊도록 계속해서 스스로를 살펴보고 감시나 채찍이 아닌 포옹과 당근을 주며 스스로를 사랑하고 안을 줄 아는 그런 멋진 사람,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의 감정을 존중하며 모든 삶을 찬사 할 줄 아는 그런 사람,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다독이며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는 사람,
Giver로써 상대를 배려하고 베풀며 살지만, 나를 잃지 않는 사람,
한마디 말을 내뱉어도 진중하고 진짜인 말을 하는 사람,
한 문장 내려쓸 땐 더욱 견고하고 깊은 언어로 표출하는 사람,
내 안이 단단하고 가득해져 베풀고 여유가 있는 사람,
깊은 사색을 통한 깊은 울림을 전할 줄 아는 그런 사람.

계속해서 이런 사람이 되는 길로 한발 한발 가까워지고 싶다.

그러다 그 길 위에서 생이 마감한다 하여도 내 영혼은 계속해서 걸어가리라.


- 비행기에 오르기 한 시간 전 쓰다. -




느꼈다시피 내가 쓴 유서는 유서가 아니다. 죽고 싶은 마음에 쓴 게 아니라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쓴 편지다. 세계여행이라는 수단을 통해 나를 더 잘 알아가고 나를 더 사랑하고 싶었다.

내용을 보면 희망사항이 참 많다고 느껴지는데, 당시 내 마음은 뭘 그렇게도 갈망했을까.

나는 뭐가 그렇게 필요해서 훌쩍 떠나버리려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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