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의 rock & roll
A그룹에 최종 합격하자 정민은 아직 취업 전선에 남아있는 친구들의 축하와 부러움을 동시에 받았다. '묻지 마 유학'을 권하던 선배들도 어쩔 수 없이 정민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김성철 교수는 이렇다 저렇다 언급이 없어 그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정민의 가족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연하다는 듯 덤덤했다. 그리고 그 '마담뚜'의 제안은 분에 넘친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불편할 따름이다.
기다리던 그룹 연수 일정이 날아들었다. 300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긴 시간 동안 함께 교육을 받았다. 실무보다는 소속감과 자긍심 고양(高揚), 계열사에 대한 개념 정립, 그룹 이념과 창업자 정신을 주입하려는 목적이 다분히 읽혔다.
주로 경기도에 있는 그룹 연수원에서 합숙 교육을 받았고, 중간마다 지방에 있는 ○○자동차 견학, ○○중공업 땜질 체험, ○○○농군 학교 봉사 활동을 했다. 듣던 대로 재계 선두를 달리며 한국 경제를 선도할 만큼 계열사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다만, 그룹 특유의 문화 탓인지 직선적이고 일방적인 성향이 강해서 마치 군대에 다시 온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B그룹처럼 교육 도중 졸고 있는 시간을 체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어느 날, 그룹 연수를 마친 300명은 대강당에 모여 각각 자사 배치를 받았다.
정민이 직장생활에 첫발을 내딛던 그 해는 세계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될 만한 큼직한 이슈가 세상을 들썩이게 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도 그중 한 사건이었는데, 정민이 유학을 생각하고 있는 나라라서 특히 관심이 쏠렸다.
냉전 시대의 정치, 이념적 분단을 상징하던 베를린 장벽은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독 정부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런데 오랜 기간 굳건하게 동서독을 가로막고 있던 이 장벽은 실로 어이없는 사건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 바람을 타고 동독 곳곳에서 여행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자, 동독 정부는 여행 규제를 완화하는 새로운 법안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자 회견에서 이 법안의 시행 시기에 대한 혼선이 발생했다.
한 기자의 질문에 정부 대변인은 ‘지체 없이’라고 잘못 대답했다. 이 보도가 언론을 통해 퍼져 나가자 동베를린 시민이 국경 검문소로 몰려들었고 국경 경비대는 한꺼번에 몰려온 많은 사람의 통행을 막을 수 없었다. 흥분한 시민은 장벽 위로 올라가 망치와 정 등으로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1990년 독일의 통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시대는 막을 내렸고 동유럽 국가들은 민주화의 길을 걸었으며 유럽 통합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A그룹의 주력 계열사들은 대부분 지방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방 근무가 마치 좌천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이를 회피하던 시절이었다. 그룹 연수가 시작되기 직전, 정민도 서울에 본사가 있는 계열사 3곳을 골라 희망 회사를 적었다. 선택 기준은 단지 그거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가 없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1지망으로 적었던 ○○경제연구소는 경제나 경영 전공자들을 우선 선발하였다. 2지망이었던 ○○증권도 같은 맥락이었다. 아쉽게도 A그룹에는 B그룹의 기조실 법무팀처럼 법학과 출신이 전공을 활용할 만한 조직이 따로 있지 않았다.
결국 정민은 ○○개발이라는 3지망 계열사에 발령을 받았다. 희망하는 회사가 아니기는 했지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 회사도 같은 그룹 계열사일 것이고, 본사가 지방이 아닌 서울에 있다. 모두가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적 제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민이 1~2지망한 그 두 회사에 가장 지원자가 많았다고 한다.
정민과 같이 호명된 7명의 신입사원은 인솔자를 따라 대강당 밖에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장면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웬 백화점 셔틀버스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개발이 ○○백화점이었어? 회사 이름이 주는 선입견에 둘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정민뿐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셔틀버스의 문처럼 입을 벌리고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렇게 '난데없는'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 도착한 곳은 강남의 ○○○동이었다.
정민을 비롯한 신입사원들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룹 연수에 이어 또다시 연수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실무 위주의 교육이었다. 다만, 그룹에 비해 인사팀의 교육 체계가 잘 갖추어진 편은 아니어서 어찌 보면 교육이라기보다는 발령받기 전 '대기'의 개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일할 '우리 회사'라는 호기심과 학교생활과는 사뭇 다른 역동적인 환경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눈밭에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마냥 신이 나서 동기들끼리 어울려 다녔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아쉬운 부분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했더라면 그렇게 황금 같은 시간을 덧없이 흘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덧 회사 연수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애초 회사 연수 프로그램에는 '신입사원 수련대회'라는 4박 5일 일정이 마지막에 잡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육 진행자가 들어오더니 이 계획이 변경되었고 수련대회 날짜는 따로 통보할 예정이라고 했다. 좀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 덕분에 원래 보다 일주일 빨리 부서 배치를 받았다.
정민을 비롯한 7명의 하반기 신입사원은 그 수가 적어서, 다음 해 2월 정기 채용 입사자들과 함께 '신입사원 수련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8월로 예정된 그 수련대회 일정 역시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불과 며칠을 남겨두고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즈음 멀리 중동 지역에서 발발한 걸프전으로 나라 안팎 정세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막대한 석유 자원을 보유한 이웃 국가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였다. 과거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며, 전쟁 부채를 탕감받고 유전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의 침략 행위를 강력히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한편, 군사적 개입을 준비했다. 특히, 냉전 종식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가 모색되던 시기에 중동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고 석유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이 적극 개입했다.
미국은 다국적군을 결성하여 '사막의 방패 작전 (Operation Desert Shield)과 '사막의 폭풍 작전 (Operation Desert Storm)'을 전개하였고, 이어서 지상군을 투입하였다. 다국적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기동력에 이라크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단 100시간 만에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걸프전에서의 승리는 미국의 군사적 능력과 국제적 리더십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공군력과 정밀 유도 무기 등 첨단 기술의 중요성을 입증하며 현대전의 양상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소속 부서에서 몇 달을 근무하다가 참석하게 된 신입사원 수련대회는 교육이라기보다는 단체 여름휴가 같았다. 강릉 경포대에 있는 자사 호텔을 베이스캠프로 4박 5일간 진행되었다. 말이 호텔이지 전부 객실에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넓은 연회장 같은 곳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단체 합숙했다. 대기업 직원 연수치고는 인색했다. 차라리 장소가 호텔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느낌이 덜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20대 청춘들은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경포대 해수욕장 백사장에서 기마전을 하고, 오대산 일대를 팀 대항 행군(?)으로 누볐으며, 저녁에는 마돈나의 보그(vogue)나 015B의 신인류의 사랑에 열광하며 노래와 춤으로 이어지는 장기 자랑이 펼쳐졌다. 회사 업종의 특성상 남녀 성비가 반반에 가까운 점이 더욱 재미를 돋우었다. 강의실에 앉아있는 작위적인 시간이 거의 없었던 점도 좋았다. 젊음과 열정을 마음껏 발산하는 뜨거운 시간이었다.
일부 청춘들의 아찔한 일탈도 있었다. 야심한 밤, 몇몇 신입사원이 인사팀이 지키고 있는 출입구를 피해, 정확히는 배수관을 타고 내려가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들 무리는 경포대 해수욕장 인근 횟집에서 술을 마셨고, 그러다가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주먹이 오고 가는 아찔한 상황을 만들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회사에서도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지만, 덕분에 이후 진행은 전보다 몇 배 고되고 힘들었다. 감시도 심해져서 한 발짝도 열외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언제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른 사람'이나 '그들의 무리'가 존재하며 그 영향은 모두에게 미친다는 조직의 기본 생리를 실감 나게 배웠다.
정민은 주로 팀리더 역할을 맡았다. 소속 부서가 기획실이었던 점이 역할 부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사팀과 교육생의 중간 역할 또는 팀 운영에 관한 일에 시간을 쏟는 일이 많았다. 힘은 들었지만, 그 덕분에 더 많은 사람과 친해질 수 있었기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를 꼽으라면 별명이 '본드'였던 고성진이었다. 황소만 한 덩치에 번들번들한 얼굴을 하고 벽을 향해 서서 막춤 삼매경에 빠진 그의 모습이 본드 마신 사람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후로도 '본드'는 돌발적인 행동을 일삼아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자기가 찾을 수 있는 선에서 찾아본 다음, 자기가 알아낸 것이 맞는지를 확인받을 것이다. 찾아도 나오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 동시에 가르쳐달라고 할 것이다. 가르쳐주면 한 번에 알아듣고 비슷한 건에 대해서는 응용해서 적용할 것이다. (중략) 효율적으로 일할 것이다.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두 번에 거쳐하고 있는 게 있다면 과정의 비효율을 건의할 것이다. 그걸 단축시키고 남은 시간에 새로운 일을 찾아 할 것이다." (장류진 님의 '연수'에서 인용)
정민은 그렇게 신입사원 시절을 보냈다. 만약 누군가 정민에게 신입사원의 길을 묻는다면 정민은 서슴지 않고 자신이 했던 것처럼 하라고 대답해 줄 것이다.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그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인드이며 태도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좀 더 성숙하지 못하였다. 주변 상황을 인식하는 통찰력과 미래를 보는 시야가 부족했다. 회사라는 조직의 실체와 사람들의 본능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일방적인 믿음과 충성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몰랐다. 이 사회에는 평범함조차 쉽게 용납하지 않는 부조리와 불합리가 만연해 있다는 현실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만약 이 모든 진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저 나만 잘하면 된다는 종두득두(種豆得豆)의 신념과 평생직장이라는 믿음으로 출발한 대기업 사원, 정민의 직장생활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어떠한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인가? 그의 미래는 면접장에서 말했던 '십 년 후의 나의 모습'에 과연 부합될 것인가?
그로부터 3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어떤 날, 오랜만에 입사 동기 7인의 모임이 있었다. 봄비가 종일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낮임에도 종로 3가 뒷골목에는 정민 또래의 또는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노인들로 북적였다. 모두의 접근성을 고려해 장소를 정한 것뿐인데 왠지 다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다른 사람의 눈에 저렇게 보일 것이라는 자의식 때문이었으리라.
그 자리에서 정민은 '신입사원 수련대회'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동기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날은 무슨 생각으로 그 사진을 들고 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 사진 속 본인의 풋풋한 모습에 놀라워했고, 어떤 친구는 마음이 설렌다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정민은 사진을 돌려보느라 정신이 없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이젠 빛바래고 쇠약해진 노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연두 빛깔로 반짝이던 사진 속 청춘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그래 이놈들아, 그때 그 시절에는 몰랐지? 그토록 그지없이 푸르던 싱그러움이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리라는 것을.